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최정호 칼럼]일본은 독일과 다르다

입력 | 2005-05-11 18:09:00


일본도 독일처럼 철저한 과거사 반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일본 외상은 폐일언하고 “일본과 독일은 다르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 점에선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두 나라가 다르다는 걸 새삼 강조한다는 것은 서로 같은 점도 많다는 인식이 앞서 있다. 사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동맹을 같이 한 나라다. 그러면서도 두 나라는 어느 일본 출판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인간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두 사건”을 같이 저질렀다. 하나는 일본군에 의한 난징(南京) 대학살이요, 다른 하나는 나치스 독일에 의한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조직적 집단 학살이 그것이다. 거기까지는 같다.

두 나라는 그 후 그처럼 인간임을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사를 어떻게 반성하고 극복하려 했느냐 하는 데에서 갈라지는 것 같다. 물론 일본도 독일과 같이 충분히 과거를 반성하고 주변 국가에 사과해 왔다고 일본 정부의 역대 수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하고 있다. 그 반성과 사과의 방법은, 그러나 ‘일본과 독일이 다르다’. 그 까닭은 “독일은 나치에 모든 것을 떠넘기는 게 가능하지만 일본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마치무라 외상의 해명이다. 역시 일본과 독일은 다르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한 두 나라의 차이를 그림처럼 보여 주는 일이 최근 또 일어났다.

▼국가 대신 개인이 용서 빈 일본▼

며칠 전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주역의 후손 둘이 방한해 홍릉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저지른 나쁜 짓’을 사죄하면서 “할아버지도 이런 저의 모습을 이해하실 것”이라고 토를 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웃나라 황실에 한밤중 구둣발로 쳐들어가서 황후를 시해한 ‘나쁜 짓’을 110 년 후 손자 대에 와서 용서를 비는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들의 원대한 반성과 장구한 사과, 그것은 2차 대전 중 나치의 범죄를 종전 직후부터 바로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하고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해 온 독일과는 확실히 다르다. 만일 아돌프 아이히만 나치 친위대(SS) 중령과 같은 유대인 학살자의 자손들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나 폴란드를 찾아 ‘할아버지의 나쁜 짓’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그러한 모습을 ‘할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것’이라 뇌까린다? 그것은 독일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다.

독일은 나치에 모든 것을 떠넘기는 게 가능했지만 일본은 떠넘길 데가 없어 억울하다는 얘기인가. 분명 아우슈비츠나 닷하우의 유대인 살인자들은 나치의 하수인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제3제국이라는 독일 국가의 배경이 있어 비로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명성황후의 시해범이나 난징의 학살범들도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배경을 업고서야 비로소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죄는 무명의 개개 하수인에게만 있고 그 배후에서 그들을 사주한 국가는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일본과 독일은 확연히 갈라진다. 전후의 독일연방공화국은 전전 독일제국의 법통 계승자로서 과거 독일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죄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고 출발했다. 독일이 모든 것을 나치에 떠넘겼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국가수반이 무릎꿇은 독일▼

명성황후의 홍릉 앞에서 무릎을 꿇은 시해범의 후손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의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무릎을 꿇은 자세는 같지만 그 뜻은 천양지판이었다. 홍릉에서는 책임져야 할 원죄인(일본 국가와 황실)은 숨어 버리고 그 하수인의 후손이 저승의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용서를 빌었다. 그에 반해 바르샤바에서는 국가를 대표해서 정부 수반이 나치의 범죄를 사죄한 것이다. 그것도 어느 기자의 감동적인 증언처럼 ‘무릎을 꿇어야 할 필요가 없는 브란트가, 무릎을 꿇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반나치 저항투사 브란트처럼 조국의 과거 죄과에 대해 개인적으론 전혀 무릎을 꿇어야 할 필요가 없는 인사가 일본의 과거 정치지도자중에도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점에서 일본과 독일은 결정적으로 다른 것 같다.

최정호 객원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