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듯, 안보이는 듯. 식당 인테리어에서 ‘가려진 공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조용하고, 다양한 공간을 원하는 고객들이 늘어서다. 사진은 고급 레스토랑 ‘타니’. 작은 사진은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이 직영하는 마르코폴로. 강병기 기자
1990년대 초 서울 강남에 통유리를 통해 실내가 훤히 보이는 카페가 등장했을 때 사회가 떠들썩했다.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는 신세대… 유학생 급증으로 인한 서구식 문화 유입….”
테이블들이 칸막이로 막힌 카페 구조에 익숙한 당시 기성세대에게 프라이버시를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이 같은 구조는 충격으로 다가 왔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밀실’이 돌아오고 있다. 파티션이나 반투명유리, 격자, 철망, 구슬 등을 이용해 절반 정도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세미 프라이빗(semi-private) 공간이 각광받고 있는 것. 이 같은 현상은 청담동 등 강남 일대 고급 식당과 카페, 바에서 두드러진다. 청담동은 국내 유행의 첨단이라는 점에서 이곳의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 밀실의 재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아미가호텔이 이번 달 말 오픈 예정으로 만들고 있는 디스코바(가제). 전체 좌석의 80%가 테이블을 둘러싼 3면을 2m 높이의 파티션으로 막은 부스형 좌석이다. 전통적인 디스코텍은 플로어를 중심으로 좌석이 배치돼 있어 ‘부킹’이 쉽고, 테이블은 춤추다 잠시 쉬어가는 개념이다. 그러나 아미가호텔의 디스코바는 이와 반대로 테이블에서 일행끼리 놀다가 기분이 내키면 춤을 추는 콘셉트를 지니고 있다.
최근 문을 연 강남구 청담동 트라이베카 5층 와인바. 이곳은 좌석의 75%가 룸이다. 와인 셀러를 통해 안이 살짝 들여다 보이긴 하지만 사실상 거의 막혀 있는 구조다. 이곳은 곧 4층 카페 일부를 개조해 룸을 늘릴 예정이다. 개방형 공간이 대세인 카페에 룸을 두는 것은 이색적이다.
청담동의 대표적인 고급 레스토랑 타니는 여러 가지 테마로 공간을 ‘변주’했다. 아예 오픈된 좌석이 있는가 하면 파티션으로 막아놓은 좌석, 구석에 숨어 있어 밖에서는 잘 안 보이는 좌석, 별실까지 다양하다. 강남구 삼성동 파크하얏트호텔의 바 팀버도 비슷한 콘셉트. 이곳도 ‘라이브러리’ ‘파이어플레이스’ 등 인테리어 주제에 따라 공간을 구석구석 막아뒀다.
○ 그들이 원한다
‘개방성’은 지난 10여 년간 서울 강남 일대 상(商) 공간의 ‘메가 트렌드’였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 흰 색 계열의 벽과 최대한 절제된 인테리어. 이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으로 불린다.
그러나 지금 왜 밀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고객이 원해서다. 타니의 김흥기(51) 사장은 “요즘 들어 막힌 좌석에 대한 고객의 요구가 부쩍 늘고 있다”고 전한다. 김 사장이 강남에서 운영하는 일식 레스토랑 ‘칸’은 현재 3개뿐인 별실에 대한 수요가 폭주하면서 홀 좌석을 막아 별실 3개를 더 만들고 있다.
“10년이 넘었는데 이제 질릴 때도 됐잖아요.” 트라이베카의 서재건(36) 팀장은 특히 취향이 자주 변하는 청담동 고객들의 선호가 밀실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S바, 궁, 호면당 등 청담동 ‘히트 상품’ 오픈을 주도했던 트렌드세터(trendsetter). “요즘 고객들은 자신들끼리 대화할 조용한 공간을 원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아미가호텔 디스코바를 설계한 일본인 디자이너 나가사와 세이치로(68) 씨도 “생활 수준이 높은 고객들을 겨냥해 프라이버시가 있고 차분한 공간을 연출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밀실인가. 인테리어 전문가들은 고급 취향의 고객일수록 좀 더 다양한 공간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샘물 에스테틱 등을 디자인한 박성칠(46) 월가디자인 소장은 “고객의 서로 다른 수요를 맞추다 보니 여러 가지 주제의 공간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이 같은 공간의 시발점을 일본 패션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 씨의 ‘콤 데 가르송’ 도쿄 본사 매장에서 찾는다. 열린 공간에 옷걸이와 소파 등을 배치한 기존 구조와 달리 ‘룸 인 룸’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는 것. 이런 경향이 한국의 인테리어에도 영향을 줬다.
타니와 카페74 등 청담동의 ‘스테디셀러’ 레스토랑을 디자인한 김윤수(39) 본디자인 소장은 한 공간이 지속적으로 고객을 끌기 위해서는 공간 자체가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청담동은 어차피 한정된 사람들이 찾게 마련이죠. 이 사람들이 자주 찾아도 질리게 하지 않으려면 한 공간 내 선택의 기준을 다양하게 해, 올 때마다 다른 경험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 그때 그때 달라요
윤재은(45) 국민대 실내디자인학과 교수는 공간철학적 입장에서 이 같은 ‘밀실’들을 ‘상대적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절반쯤 막아 둔 공간은 보는 사람에 따라 밀실로도, 광장으로도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벽이나 문 등 구조물을 통해 공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절대적 공간이 대세를 이뤄온 데 비해 최근에는 사용자의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상대성이 다중들의 실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