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는 황금을 얻고자 증류기 비슷한 밀폐 공간에다 각종 금속을 섞어 넣은 다음 높은 온도의 열을 가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이런 ‘연금술적’ 발상이 뜻밖에도 20세기 독일 소설문학에서 언뜻 엿보이는데 토마스 만의 대표작 ‘마의 산’(1924)이 그러하다.
‘마의 산’이라니, 대체 무슨 산인가? 스위스 고산지대의 소읍 다보스에 있는 고급 호텔식 폐결핵요양소 ‘베르크호프’이다.
이제 막 조선기사 시험에 합격하여 곧 함부르크의 조선소에 취직할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로프가 여기에 도착한다. 환자로 입원하러 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입원해 있는 사촌형을 문병하기 위해 3주 예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입원해 있던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 세템브리니는 카스토르프에게 ‘죽음’의 세계에 흘러 들어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당장 ‘저 아래’의 시민 세계로 복귀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러시아 여인 쇼샤 부인에게 마음이 끌린 청년은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그만 병에 걸리고 만다.
함부르크의 시민이 ‘죽음’의 공간(마의 산)의 구성원이 된 것이며 토마스 만의 ‘죽음’의 연금술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에 다섯 끼씩 중후한 식사를 하면서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취생몽사 상태에 빠져 7년 세월을 허송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하산하여 곧 참전한다. 포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보리수’ 노래를 부르며 진흙탕 속을 행군하는 주인공의 장래 전망은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다.
1차 대전 이전의 답답한 분위기를 감안하면 시대소설이지만 베르크호프라는 ‘폐쇄 공간’이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시간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는 ‘눈(雪)의 장’에서 스키를 타고 설원을 헤매다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주인공은 몽환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서 자기 사고(思考)의 지배권을 죽음에다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깥 세계와 차단된 ‘죽음’의 공간에서 역설적이게도 ‘삶’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독일 교양소설의 변종의 하나인 ‘성년식(成年式) 소설’로도 읽힌다. 그가 7년 동안의 취생몽사 끝에 마침내 얻게 된 깨달음이 전사 직전에 처한 그의 상황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그의 ‘마의 산에서의 체험’을 추체험(追體驗)해 가면서 정신적 고양(高揚)을 얻게 된다.
토마스 만이 자신의 독자에게 이 책을 두 번 읽기를 권한 까닭도 이 간접 체험의 보편적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을 찬찬히 읽는 독자는 서구 정신사를, 그 감성적 구체성 속에서, 축약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주인공은 그의 두 스승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격렬한 논쟁을 거의 중립적인 태도로 경청하지만 독자는 그들의 온갖 논거를 두루 거침으로써 자신이 한 단계 더 높은 교양인으로 거듭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20세기의 ‘연금술사’ 토마스 만을 만난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안삼환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