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남과 북이 그 전해 12월 역사적인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한 데 이어 새해 1월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채택하고 각종 실무회담을 쏟아내던 때였다.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발족됐다. 남측 위원장은 공로명(孔魯明). 초대 소련 주재 대사였다.
공 위원장은 외무부 기자실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기자들에게 핵협상 진행 과정을 브리핑했다. 그러나 공 위원장이나 기자들이나 핵에 관한 한 문외한이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공 위원장이 불쑥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도대체 핵이라는 게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한번 보러 가자.” 당시 경남 기장의 고리원전을 갔다. 방사능 피폭 방지복을 입고 문제의 ‘사용후 핵 연료봉’을 보관 중인 냉각 수조를 들여다봤다.
기자는 그때 처음으로 핵이라는 것의 ‘실체’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물빛 때문이었을까. 깊은 수조 속에 담긴 연료봉들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수조 속에서 자라는 ‘외계 생물’을 보는 듯했다. 음산했다.
남과 북이 합의한 핵통제공동위원회였지만, 결국 북한 핵문제를 통제하지 못했다. 북한은 93년 사찰 압력에 반발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전격 탈퇴했고, 한반도는 제1차 핵 위기에 휩싸였다. 숱한 보도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래도 92년 여름 푸른 수조 속의 폐연료봉을 볼 때 같은 ‘위기의 실체’는 느껴지지 않았다.
2005년 5월. 북한 핵은 아직도 ‘말의 위기’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핵 보유 선언이나 뉴욕타임스의 북한 핵실험 임박설, 북한 외무성의 폐연료봉 8000개 인출 발표…모두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1차 위기 때는 외무장관을, 2차 위기 때는 주미대사를 맡아 북핵 위기를 ‘관리’한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교수도 그런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지난주 동아일보가 특별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한 교수는 말을 아끼면서도 현 상황을 ‘분명히 실체가 있는 위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번 겪어봤는데…” 하는 ‘엉뚱한 면역 효과’가 가져온 불감증과 한미 간의 신뢰 상실을 걱정했다. 실체도 가늠하기 힘들던 1차 위기 때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국민적 합의와 동지 정신이 있었는데, 정작 위기의 실체가 분명한 지금은 그런 게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요즘 워싱턴에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북핵 정책이 실패했다는 얘기가 많다. 북한의 핵무기 숫자만 늘려 놨다는 것이다. 그럼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같은 논리라면, 노무현 정부도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 정부의 면면들을 보면 북핵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부시 행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먼저 실패부터 자인해야 한다. 어쩌면 실패를 인정하는 데서 서로의 신뢰가 싹틀지도 모를 일이다.
15세기 말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간웅(奸雄) 체사레 보르자의 칼에는 이런 검명(劍名)이 적혀 있다. ‘FIDES PRAEVALET ARMIS(신뢰가 무기를 이긴다)’. 간웅의 깨달음도 이랬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