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자료사진
칠레 출신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1949∼)는 첫 부인이었던 카르멘 야네스와 이혼한 지 20년 만인 1996년 다시 만나 같이 살기로 했다. 그들이 정착지로 택한 곳은 대서양이 보이는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의 항구 도시 히혼이었다. 세풀베다에게 바다는 어떤 곳이었던가. ‘세계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를 말해 주는 곳, 자유를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바다를 떠난 그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는 열여섯 살 되던 해, 고래잡이 소설에 매료돼 무작정 포경선에 올라타고 넉 달간이나 주방에서 일했다. 1980년부터 약 10년간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독일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살았다. 게다가 그는 환경단체인 그린피스의 일원으로 실제 순시선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세풀베다는 ‘여행병’에 걸렸다고도 할 수 있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인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미성년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결혼 반대를 피해 아버지와 도피 여행을 하다가 한 싸구려 호텔에서 세풀베다를 낳았다. 세풀베다는 불과 열세 살 때 칠레를 종단 여행했으며, 스무 살 때는 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다. 스물여덟 살 때는 칠레 군사정권으로부터 ‘나갈 수는 있으나 돌아올 수는 없는’ 여권과 추방령을 받은 후 3년간 아메리카 대륙을 구석구석 누볐다. 서른 살이 넘은 뒤부터는 유럽의 서너 나라를 옮겨 다니며 지내고 있다. 많은 경험 때문인지 세풀베다의 글은 편안하다. 사람도 편안하다. 내가 그에게 e메일을 보내 글을 쉽게 쓰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지식인이 아니라서 추상적이고 거대한 이야기를 할 능력이 없어요. 그리고 쉽게 써야 독자들이 내 글을 편하게 읽지 않겠어요?”
그의 최고작 ‘연애소설 읽는 노인’(1989)은 바로 이러한 작가의 관점이 십분 투사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노인이다. 그는 부인을 잃고 미완의 사랑을 상징하는 ‘엘 이딜리오(풋사랑)’라는 아마존 마을에 산다. ‘가슴 아픈, 그러나 행복하게 끝나는 사랑’이 주제인 연애소설을 읽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중남미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 인간과 자연, 문명과 야만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다.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중남미 문학은 유럽의 가치관을 문명의 규범으로, 아메리카의 원시적인 자연과 원주민을 야만의 규범이며 문명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이른바 ‘붐(boom)’세대 작가들의 소설 주인공들은 원주민의 신화와 전설, 신앙과 같은 ‘야만’적 요소와 서구적인 ‘문명’적 사고가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었다.
세풀베다는 이들의 뒤를 잇는 ‘포스트 붐’ 세대의 선두주자다. 그에 이르면, 자연의 이치를 존중하는 삶을 살려는 원주민, 이들과 어울리는 주인공 노인이 ‘문명화’된 인간들이다. 반면 밀림에 자기 삶의 방식을 이식하려는 촌장과 백인 밀렵꾼들은 자연의 섭리를 존중할 줄 모르는 ‘야만화’된 인간들로 그려진다.
세풀베다에게 그의 가족관계를 물어보았다. “아들이 다섯, 딸이 하나, 손녀 하나, 손자 하나. 카르멘과의 사이에 난 아이들도 있고, 재결합하면서 카르멘이 데려온 아이, 나와 두 번째 아내 사이에 난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은 칠레, 에콰도르, 스웨덴, 독일 국적들을 가졌다. 일년에 한 번 가족이 다 모이면 아주 재미있는 범세계 가족이 된다.”
그는 “아이들에게는 ‘나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도 존중해라’ ‘약한 사람을 보호해라’ ‘관용을 베풀어라’”라고 말한다.
세풀베다는 국적의 개념, 애국심이라는 개념에 무심한 ‘세계 시민 작가’다. 하지만 중남미문화, 스페인어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각별하다. 자신은 “자랑스럽게 스페인어로 글을 쓰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몇 년 전부터 세풀베다는 중남미 아메리카 작가들의 유럽 진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고 있다. 그가 위원장 자격으로 1997년부터 히혼에서 매년 개최하는 ‘이베로 아메리카(중남미 전역) 도서 살롱전’이 좋은 예다. 그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5월 12일부터 17일까지 이 살롱전을 연 다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올 예정이다. 그는 “한국 문학과 영화가 상당히 훌륭하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다”며 이번 한국 방문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고혜선 단국대 스페인어 전공 교수
○ 루이스 세풀베다는…
△1949년 칠레 북부 오바예에서 출생
△1969년 ‘페드로 나디에의 역사’로 쿠바의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단편상 수상
△1977년 칠레에서 추방됨
△1980년 독일 함부르크에 정착
△1989년 ‘연애소설 읽는 노인’으로 스페인의 티그레 후안 상 수상
△1997년 스페인 히혼으로 이주
△작품 ‘연애소설 읽는 노인’(1989) ‘지구 끝의 사람들’(1989), ‘귀향’(1989)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 ‘감상적 킬러의 고백’(1996) ‘악어’(1997)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1996) ‘악어’(1997) ‘소외’(2000) ‘핫라인’(200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