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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김용희]5·18 슬픔을 넘어

입력 | 2005-05-17 18:30:00

5.18 ‘광주 그 때 그 아이’ 조천호씨. 동아일보자료사진.


여기 작은 사진 하나가 있다. 죽은 아버지의 영정을 영문도 모르고 안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하얀 저고리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어린아이의 눈망울. 눈망울은 너무 크고 맑아 역사적 슬픔이 차라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1980년대 광주의 현장은 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 응결돼 강렬하게 역사적 기억을 뿜어내고 있다. 5월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참혹한 핏자국을 남기고 있으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자 과부하로서의 역사적 부채감만이 우리의 유일한 양식이 된 것 같다.

국가주의의 전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했을 때 곽재우 등 봉기한 의병들은 왜적과 싸우며 조선을 지켜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공신책봉에서 전공을 세운 사람들을 봉한 선무공신(宣武功臣)에는 이순신 권율 등 18명만이 책봉되었다. 의병장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했다. 해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23회나 이끈 이순신의 죽음에 의문이 드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백성을 버리고 간 선조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이순신의 공을 순수하게 받아줄 수 없었던 자격지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절대권력이 흔들릴까 두려움이 컸던 탓이었다. 이순신은 죽음으로써 역적이 아닌 충무공이 됐다. 이순신의 목숨을 보존케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나라 조선이 아니라 왜적이었다. 국가와 개인간의 철저한 불신과 길항이 한민족에게 뼈아픈 역사가 된 것이다.

▼갈수록 가족화 되는 광주의 恨▼

이승만 정권은 6·25전쟁이 터지자 한강다리를 끊고 먼저 도망갔다. 1960년대 군사정권은 일제 징용과 전쟁 피해자 보상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졸속으로 처리했다. 7년 동안의 임진왜란 때도,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 때도. 그리고 6·25전쟁과 광주학살 때도 국가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했다. 개인을 지킨 것은 ‘가족’이었다. 전후(戰後) 현실 속에서 삯바느질과 떡장수와 국밥장수를 한 사람도, 민주화 투쟁으로 감옥에 갔을 때 면회를 와 사식을 넣어준 분도 어머니였다.

1998년 국가 외환위기 상황도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민들은 한뜻을 모았다. 그러나 실직과 명예퇴직 끝에 사람들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가족은 국가의 위기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가족이 유일한 안식처라는 가족 환상은 가족 이데올로기, 가족주의를 만들어낼 뿐이다. 가족 환상은 국가주의에 대한 지독한 환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국가주의의 전횡에 대한 슬픔의 몫도 가족주의의 이미지로 구성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은 가족의 슬픔으로 치환되곤 한다. 슬픔은 다시 미학화된다. 우리 민족은 언제나 역사적 현장에서 희생당한 한(恨)의 민족이 되고 그 슬픔은 철저히 가족화된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한민족처럼 꿋꿋한 의지의 사람들도 드물다. 이것은 순진한 민족주의자의 발상이 아니다. 동학혁명과 의병 봉기, 독립군과 학도병. 이 저력이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1960년대 “그놈의 사진(군부시절 항상 걸려 있던 어떤 분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인 김수영의 절규가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과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10일 시민들의 함성 등도 있었다. 광주의 민주화운동이 있었기에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말은 단순하고 손쉬운 수사가 아니다.

▼저항의 힘을 민족의 저력으로▼

슬픔을 가족화하고 미학화하는 그 안쓰러운 사진을 걷자. 상처를 매너리즘화하고 상습적인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는 광주의 슬픔을 매장하자. 민주화 투쟁을 위세 좋은 완장으로 자처하면서 정치적 보루로 삼는 자들의 허세를 추문으로 만들자.

광주의 핏값은 슬픔의 극대화가 아니라 한민족이 가진 순연한 저항의 힘을 민족의 저력으로, 민주화의 힘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역사적 고통이 아니라 더 나아갈 민주화를 위한 전위적인 힘, 승리의 힘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5·18의 진실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