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를 풀고 우물가에서 기어 나오더니 급기야 텔레비전 바깥으로까지 튀어나오던 ‘링’의 원혼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엘리베이터 천장에서 스물스물 기어 내려오는 산발한 머리는 또 어떤가. 더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옥상 물탱크에 오래전부터 시체가 유기돼 있다면?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살았다면?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으실 필요는 없겠다.
언제부턴가 ‘링’이니 ‘주온’이니 하는 일본 공포영화는 되도록이면 피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의연한 척 그리고 담대한 척하지만 집에서 혼자 잘 때나,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때, 그리고 밤에 혼자서 야근할 때를 생각하면 참 끔찍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들 영화가 자꾸만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이제는 아예 할리우드판으로 리메이크까지 돼 일본판에 비해 훨씬 더 큰 배급 규모로 극장가에 걸리고 있기 때문에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할리우드는 요즘 들어 이 일본식 공포영화에 걸신이 들린 듯 잇달아 작품을 리메이크하고 있다. 1998년에 만들어진 나카다 히데오의 ‘링 1, 2’를 각각 2002년과 2005년 리메이크한 것을 비롯해 지난해에는 일본영화 ‘주온’을 ‘그루지’란 제목으로 다시 만들었다. 최근에는 또 나카다 히데오의 ‘검은 물밑에서’를 브라질 시네마 노보의 기수인 월터 살레스 감독을 기용해 만들고 있다.
이 영화의 주연은 A급 스타인 제니퍼 코넬리다. 할리우드에서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인기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데 미국판 ‘링2’는 그를 직접 데려와서 만들 정도였다. ‘그루지’도 원판 감독인 시미즈 다카시를 데려와서 만들었는데, 이 영화의 경우 10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1억8000만 달러를 벌어들여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일본 공포영화가 미국에서 왜 이리 인기를 얻고 있는지는 일본 공포영화 그 자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에서 공포영화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일본 내 사회경제구조의 취약성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본사람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그 전 시기에 형성됐던 버블경제의 몰락을 목도하면서 삶이 예전처럼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을 체감하게 됐다. 능력이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들이 언제든지 추락할 수 있다는 공포를 갖게 됐고, 그 같은 사회적 두려움이 이들 공포영화에 투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 점, 그러니까 사회적 추락에 대한 공포를 지금의 미국인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일본 공포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인기리에 리메이크되는 이유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자신들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할리우드식 공포물은 비록 ‘엑소시스트’류의 오컬트 무비(악령이나 원혼 등 초현실주의적 공포를 다룬 영화)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선악의 구분을 분명히 했던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 호러는 선악이 지나치게 모호(ambiguity)해서 관객들을 더 궁금하게 만들고, 더 생각하게 만들며, 무엇보다 더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실제 세상사가 그렇다.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지가 않다. 부당과 불합리와 불의가 오히려 지배 권력의 모습을 띨 때가 많다. 한마디로 지금의 미국 관객들은 비로소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회적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해몽이야 어떻든 그건 받아들이는 사람들 몫이다. 다만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일본판이든 미국판이든 이들 영화가 한국에서도 인기를 모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인기를 얻는다는 건 그만큼 우리사회도 흔들리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들 영화의 흥행 성공을 바라면서도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라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루지’는 26일 개봉 15세 이상. ‘링2’는 6월 3일 개봉. 15세 이상.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