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최초의 천연두 예방 백신을 발견한 지 200여 년이 지났다. 20세기 백신 연구로만 25명의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아직도 전 세계에서 해마다 1700만여 명이 감염질환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에이즈 등의 감염질환이 ‘난치병’으로 불리는 것은 변종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기 때문. 아무리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한다 해도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무용지물이 된다.
○ DNA 백신으로 암과 C형간염 막는다
‘차세대 백신’은 변종 병원체(病原體)가 생기기 전에 면역을 유도하거나 감염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개발되고 있다. 그 선봉에 있는 것은 ‘DNA 백신’ 등 병원체의 유전자를 이용한 것이다.
1999년 12월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성영철 교수팀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에이즈 예방 DNA 백신의 임상시험에서 성공적 결과를 얻었다. 금년 2월에는 다시 결핵의 예방과 치료를 돕는 DNA 백신을 개발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DNA 백신의 원리는 간단하다. 병원체의 DNA를 몸속에 주입해 면역력을 유도하는 것. 병원체의 DNA가 인체의 DNA에 섞여 들어가 단백질을 만들어 내면 인체는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이 단백질을 파괴하기 위해 면역시스템을 통해 스스로 항체를 만들게 된다.
DNA 백신은 또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죽이는 ‘T면역세포’ 활동을 촉진하는 역할도 한다. 변종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이 ‘세포면역’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천식, B형간염, 말라리아 등에 대한 DNA 백신이 개발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DNA 백신은 암과 C형간염에 대해서도 이상적인 차세대 예방법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병원체의 유전자를 이용한 백신은 기존 백신 100분의 1 정도의 양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병원체의 항원 부분만을 떼어내서 사용하기 때문에 병원체 전체를 쓰는 기존 방법에 비해 불순물 위험도 거의 없다.
그러나 전망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 DNA에 병원체의 DNA가 섞일 때 돌연변이로 새로운 질병이 나타날 위험이 있어 장기적인 안전성 검증이 필요하다.
○ 모든 감염질환에 도전
동남아를 중심으로 인체 감염 사례가 늘고 있는 ‘H5N1’ 조류독감에 대비한 백신 개발도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이용해 진행되고 있다. 미국 전염병연구소(NIAID)는 최근 사노피파스퇴르사의 조류독감 예방 백신에 대한 임상시험을 시작했다.
이 백신은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대장균에 넣어 4∼6주 대량 증식해 만들어진다. 바이러스를 계란 안에서 키운 다음 약화시켜 만들던 예전 방식에 비해 급성 유행 독감에 대해서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도 2년 내 상용화를 목표로 마무리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사와 머크사의 백신은 모두 성관계로 인한 인간유두종바이러스(HPV)의 감염을 차단한다.
분만 때 산욕열의 원인이 되는 ‘B형 연쇄구균’에 대한 백신 개발도 미국과 유럽에서 20년 가까이 연구된 끝에 임상시험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 1회 접종으로 한꺼번에 질환 예방
미국과 유럽에서는 최근 1회 접종으로 여러 가지 질환을 한꺼번에 예방하는 ‘혼합 백신’ 접종이 늘고 있다. 주사로 인한 부작용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데다 어떤 백신을 접종했는지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디프테리아·백일해·파상풍(DPT)과 뇌수막염 복합 백신, A형과 B형간염 복합 백신이 시판되고 있다.
차세대 백신은 접종 방법에서도 큰 변화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지긋지긋한 ‘주삿바늘’과 작별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 피부에 바르는 DPT 백신, 유전자 조작을 이용한 ‘과일백신’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만 시판되고 있는 ‘콧속에 뿌리는’ 독감 예방 백신도 곧 해외 임상을 마치고 시판될 전망이다. 주사로 맞는 백신과 만드는 방법은 비슷하지만 코 점막 세포에 직접 닿아 면역력을 높여 주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도움말=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우준희 교수,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이제호 교수)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