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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비겁한 공권력

입력 | 2005-05-24 03:55:00


한총련 운동권과 반미(反美)단체원들이 15일 대낮에 광주 공군 전투비행단의 철조망 수백m를 뜯어내고 부대 무단진입을 시도했다.

노무현 정권도 전두환 정권처럼 정통성이 없다고 이들은 보나. 그래서 체제에 대한 도전도 저항권(抵抗權) 행사라고 믿는 건가.

이들의 ‘패트리엇 기지 철수’ 주장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거꾸로 “이런 요구는 안보상황과 국민의 방위비 부담을 감안할 때 국익에 반하는 이적(利敵)행위”라고 주장할 자유도 있다.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에 대한 방어능력이 취약한 우리로서는 패트리엇 전력(戰力)이 절실하다.

아무튼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들의 집시법과 군형법 위반 부분이다. 군용시설 손괴는 민간인의 경우에도 무기징역 또는 징역 2년 이상에 해당하는 무거운 범죄행위다.

지금은 권력의 정통성이 문제되는 전(全) 정권시절도 아니다. 노 대통령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이 선출하고 패자(敗者)도 승복한, 그리고 헌법재판소도 탄핵을 기각한, 그래서 정통성을 부인할 수 없는 대통령이다.

민주정부라 하더라도, 또는 민주정부이기 때문에 국민이 언표(言表) 수준에서 반노(反盧)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다. 그러나 시위대는 국가 재산 즉 국민의 재산이자,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안보시설을 버젓이 제거했다.

어떤 보수단체도 정권이 싫다고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반국가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은 왜 국가 재산에 손실을 입히는가. 더구나 군사시설이다.

정통성 있는 정부하의 이런 행동은 대한민국 국가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이런 범죄를 용납하는 정부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법치 민주국가로서 국기(國基)가 바로 서 있는 나라라면 즉각 체포해 법의 심판대에 올렸을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보다 가벼운 시위라도 법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면 가차 없이 진압한다.

노 정권은 정통성을 스스로 부인하는가. 경찰은 군사시설을 뚫은 시위대 3000여 명 가운데 한 명도 현장에서 잡지 않았다. 경찰은 뒤늦게 조사에 들어갔다. 군(軍)도 직무를 유기했다.

그렇다면 공권력(公權力)은 누구의 눈치를 살피는가. 대통령인가, 범법을 서슴지 않는 시위대인가. 납세자인 다수 국민이 그런 눈치 잘 보라고 시키기라도 했나.

노 대통령, 이해찬 국무총리, 윤광웅 국방장관, 허준영 경찰청장은 하부의 직무유기에 대해 어째서 한마디 말도 없나. 침묵도 메시지다.

광주에서는 재작년 5월 18일에도 한총련 기습시위가 있었지만 공권력은 허둥대기만 했다. 결국 현직 대통령이 정문 아닌 후문으로 드나들고, 기념식장에 16분 늦게 도착하고, 일부 일정은 취소되고, 대통령 화환은 짓밟혔다. 몇몇 정치인들은 시위대에 멱살 잡히고, 식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다음 날 노 대통령은 “난동자를 엄벌하라”고 했다가 이틀 뒤 “정상을 참작해 융통성 있게 처리하라”고 말을 바꾸었다. 어떤 선진민주국가가 이런 법집행(law enforce-ment)의 자기붕괴 현상을 보이는가.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일수록 주장의 방법과 절차상의 정당성을 중시한다. 권위주의 청산과 권위의 붕괴는 전혀 다르다. 국가 권위의 붕괴는 곧 국가 시스템의 위기를 뜻한다. 공권력이 법에 따라 정상적으로 행사되지 않는 것은 국민에게 필요한 공공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것이다.

한총련은 그해 8월 미군 사격장에 불법 난입해 장갑차를 점거하고 성조기를 불태웠다. 이에 대해 여당 의원들조차 “헌법의 기본 가치에 도전한 반국가사범으로 단죄하라”고 촉구했지만 대통령의 실세(實勢) 비서는 “한총련의 합법화가 어떻게든 필요하다”며 딴청을 부렸다.

법집행에 있어서 정권 지지그룹이나 잠재적 내 편인 ‘떼쓰는 집단’에 대해 과잉 관용을 보이는 것은 노 정권의 확고한 실리노선인가. 그 결과로 공권력이 붕괴되고 법치가 실종돼도 꿈쩍하지 않기로 했나.

공권력이 비겁하면 선량한 국민의 자유가 아니라 불량집단의 자유만 늘어난다. 소수의 무법자들이 다수의 착한 국민을 위협하는 세상은 약탈사회를 예고한다. 노 정권은 이런 세상을 만들어 물려주기로 작심했나.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