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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김이연]예뻐지는 남자들

입력 | 2005-05-24 03:56:00


어디서 본 듯한 꽁지머리의 남자가 백화점 지하 식품 야채코너에서 오이를 고르고 있었다. 맑고 행복한 시를 써서 주부들 팬이 많은 전업시인 아무개 씨였다.

그는 두 개씩 포장되어 있는 오이를 들고 꼼꼼하게 살핀다. 그러다가 세일이란 종이가 붙어 있는 오이 무더기 쪽으로 가서 두 개를 골라 바구니에 담는다.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칠까하는데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 온다. 어쩔 수 없이 마주 인사를 할 수밖에.

목요일은 정기 휴일이기 때문에 야채는 수요일 오후 다섯 시에 오면 반값에 살 수 있다고 그가 알려 준다. 자상하기도 하지, 그의 아내는 어떤 여자일까, 무지 행복하겠다.

그가 프레시주스 코너에서 주스 한 잔을 대접하겠다는 걸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피했다.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남자와 마주 서있는 것도 그렇고 그가 숱도 별로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꽁지머리로 묶어 늘어뜨린 것도 그렇다.

계산대에서 그를 또 만난다. 주부습진에 잘 듣는 약이 어디 있느냐고 그가 큰 소리로 묻는다. 그는 비닐장갑을 끼는 게 싫어서 맨손으로 설거지를 했더니 습진이 생겼다고 말한다. 계산대의 여자들이 웃음을 참는다. 웃을 수 없는 나는 “이 안에는 약국이 없고 주부습진은 약으로는 낫기 어려우니 피부과에 가보라”고 일러주곤 급히 그 자리를 떴다. 심하다.

장가 간 아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하는 모습을 본 어머니가 다시는 아들네 집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면박을 준 적이 있다. 그 후 2,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엔 주부습진이 걸린 남자를 만난 것이다.

꽃꽂이나 요리를 배우러 다니고 십자수를 놓는 남자도 본 적이 있다. 집에서 아내의 화장품을 얻어 바르고 휴일엔 얼굴에 마사지하는 남자들이 조금씩 생기다가 이젠 본격적으로 남성 화장품이 나와 잘 팔리고 있다.

그래서 거리에 다니는 여자들을 힐끔거리며 구경하기를 즐기는 남자들이 많았던 1960, 70년대 얘기처럼 요즘은 길에 나가 남자들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

꽃무늬 와이셔츠에 핑크빛 넥타이를 맨 남자를 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큐빅이 박힌 헤어밴드를 머리에 낀 남자도 본다. 올여름엔 남자들도 아가씨들처럼 배꼽티에 민소매 옷을 입을 조짐도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눈썹을 다듬고 손톱 손질도 한다. 그들의 소지품 중엔 손거울도 있고 간단한 화장품도 들어 있다.

그런 남자들이 이상한 직업을 가졌거나 특별한 남자가 아니라는 데 더 걱정이 된다. 말투도 여자처럼 애교를 부리고 가끔은 혀 짧은 소리도 낸다.

취직을 하기 위해 얼굴 성형까지 해야 하는 남자들의 처절한 생존경쟁을 보면서 그걸 생존경쟁이라고 생각해 주는 여성들의 아량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를 남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화되어 가는 자기 자신을 감추면서 그걸 즐기고 있는 남자가 늘고 있다.

부드럽고 매너 있고 개성 있는 것이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남자들의 콘셉트’이다.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초등학교나 중등학교 교사가 대부분 여성인 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막강한 파워를 지닌 어머니의 가정교육 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내 아들, 내 남편의 여성화를 가까이 있는 여자가 부추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들이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붙인다면 깜찍한 해석일까.

이상의 ‘날개’에서처럼 몸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아내를 가졌다는 사실을 자책하며 종일 방에 갇혀 술 마시고 고민하는 남편의 모습이 차라리 그리운 요즘이다.

김이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