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위원장
한국도로공사와 싱가포르 투자회사 EKI의 충남 당진군 행담도 개발사업의 실체가 점차 베일을 벗고 있다.
특히 대통령자문기구인 동북아시대위원회가 개입된 데 이어 건설교통부 고위 간부까지 EKI의 해외채권 발행을 돕기 위해 정부 차원의 ‘보증서’를 써준 것으로 확인돼 의혹이 범정부 차원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개인 차원인가, 정부 차원인가=동북아시대위원회 문정인(文正仁) 위원장은 김재복 행담도개발㈜ 사장에게 보낸 ‘정부 지원 의향서(Letter of Support)’에서 김 사장의 해외 채권 발행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확인한다고 썼다.
이 공문 내용에는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 이와 상응하는 감독 권한을 행사하는 모든 부처’가 이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는 표현도 들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 사업을 보증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투자하라는 취지다.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이 지난해 9월 김재복 행담도개발㈜ 사장에게 추천서를 써준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의혹이 커지고 있다. 24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내 동북아시대위원회 사무실로 한 내방객이 들어가고 있다. 연합
문 위원장뿐만 아니라 건교부 강영일(姜英一) 도로국장도 김 사장에게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내용의 공문을 써 줬다.
이 때문에 뭔가 범정부적 커넥션이 작동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 문 위원장은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한다’고 했고, 강 국장은 서명란에 ‘건설교통부 장관 대리’라고 병기했다. 공직 사회의 특성상 일선 부처의 국장이 임의로 소속 장관을 ‘대리’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문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기자와의 통화에서 “스태프와 상의했다. 사실상 위원장으로 일을 시작한 지 2, 3주밖에 안 됐을 때다”며 “국제적 관행이 그렇다고 해서 그런 표현(‘정부를 대신해’)을 썼다”고 해명했다.
자체 판단으로 보증서를 써 줬다는 설명이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학자 출신인 문 위원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북아시대위원회의 스태프도 ‘정부를 대신해’라는 식의 표현이 담긴 공문을 외부에 보낸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몰랐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편 문 위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정부 지원 의향서를 써 준 이유에 대해 서남해안 개발사업(S프로젝트)의 투자 유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민간기업의 개별 사업을 정부기구가 지원하고 나선 것은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많다.
문 위원장은 ‘행담도 개발사업이 잘 되면 S프로젝트 투자 유치도 잘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지만 확실한 증거나 담보는 없었다.
문 위원장은 ‘S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약속을 문서로 받아놓거나 회의록으로 남겨놓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은 없다. 주한 싱가포르 대사와 저녁식사 자리에서 말로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12명의 투자조사단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일이 움직여 나갔다”고 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24일 “문 위원장이 개별 사업에 그런 보증서를 써 준 것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재복 사장의 로비=김 사장이 문 위원장과 강 국장 등 정부 관계자들을 끌어들이게 된 것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등 사업 추진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지난해 1월 18일 1차로 부도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급히 당시 오점록 한국도로공사 사장에게 SOS를 쳤고 오 사장이 1월 16일 도공 이사회를 소집해 1억500만 달러의 빚을 보증하는 문제의 불평등 협약(자본투자협약)을 체결했다.
당시 변호인단과 일부 이사진, 실무진은 이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오 사장이 강력히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은 이날 오 전 사장에 대한 조사에서 이 부분을 집중 추궁했다.
도공의 자본투자협약을 조흥은행에 제시해 부도 위기를 넘긴 김 사장은 자본 조달에 매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특히 오 사장이 지난해 3월 폭설대책 미비로 물러난 이후 손학래(孫鶴來) 현 도공 사장이 취임하면서 도공 측이 김 사장의 사업에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 사장은 문 위원장 등 정부 관계자들을 통해 애로를 호소하고 정부 지원 의향서를 써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감사원은 파악하고 있다.
문 위원장이 EKI의 해외채권 발행에 1억500만 달러의 지급 보증을 해준 도공과 EKI 간에 계약 이행 문제로 분쟁이 생기자 도공 측 관계자를 불러 계약 이행을 종용하는 등 EKI의 사업 진행 과정에 적극 개입한 경위도 의문이다.
문 위원장은 “올 2월 김재복 사장이 ‘도공이 계약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투자유치에 어려움이 있다’는 민원을 제기해 와 자체 조사 뒤 양측을 불러 ‘기업을 못 움직이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도공에)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감사원 관계자는 “문 위원장이 중재에 나선 시점과 정보통신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와 교원공제회가 8300만 달러의 채권을 매입하게 된 시점이 올해 2월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 위원장의 중재 후 비로소 EKI의 채권 발행이 원활하게 이뤄졌을 가능성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