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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근영아, 어서 야해져라?!

입력 | 2005-05-26 03:21:00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이 구사하는 기본 표정. ‘전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말하는 듯한 이 순진한 얼굴은 해맑게 웃는 모습과 함께 문근영을 대표하는 두 가지 표정이 됐다. 이런 문근영에게 어떤 섹슈얼리티를 기대할 것인가. 사진 제공 필름사공일


‘근영아, 크지 마라.’

22일로 200만 관객을 넘어선 ‘댄서의 순정’은 주연배우 문근영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착하고 귀엽고 순수하고 똘똘한’ 문근영의 기존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는 ‘19세 옌볜 처녀’가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룸바를 추는데도 그 섹슈얼리티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문근영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감독은 그녀가 룸살롱에서 일하는 장면을 삭제해 버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는 고3 소녀 문근영의 섹슈얼리티가 행여나 스며 나오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하는 억압적 장치들이 숨어 있는데….

우선 발. 로맨스영화에서 남자가 여자의 발을 어루만져 주는 건 십중팔구 성적 교감(sexual intercourse)의 암시. 하지만 이 영화는 문근영의 반응을 통해 그런 성적 긴장을 증발시켜 버린다. 영새(박건형)가 호된 춤 연습으로 멍투성이가 된 채린(문근영)의 발을 어루만져 주자, 채린은 야릇한 감정을 갖는 대신 간지럽다며 “으히했으호홋”하고 애처럼 웃어버리는 것.

이것으로도 모자랐던 걸까. 채린은 “그 큰 손으로 제 발을 꼭 붙잡아 줄 땐 마음속으로 이렇게 얘기해요. 이 사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말한다. 영새의 행위에 대해 ‘여자’로서 육체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피보호자’로서 감사하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 또 이때 채린과 영새의 모습은 멀리서 바라보는 롱 샷으로 처리되는데①, 이는 클로즈업을 사용해 여자 발가락의 다채로운 존재감과 탐스러운 곡선을 잡아내는 일반적 방식(②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 참조)과 다르다. 문근영의 발을 성적(性的) 기호로 부각시킬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

다음은 키스. 청춘 로맨스엔 차고 넘치는 키스 신이 이 영화엔 일절 없다. 영화 막바지, 반딧불이마저 날아다니는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영새와 눈이 마주친 채린. 통상 “사랑해요”라며 입을 맞춰야 할 타이밍(관객도 물론 이걸 기대한다)에 그녀는 생뚱맞게도 이런 멘트를 날린다. “아저씨, 저 많이 자랐죠?”③ 그리곤 울먹인다. 한마디로 ‘아직 더 자라야 할 문근영이기에 키스로 순도를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얘기. 로맨스 영화에서 아슬아슬한 듯 조명되는 여자의 ‘자는 모습’도 이 영화에선 발랄하고 신나게 다뤄진다. 피곤함을 못 이긴 채린은 아이처럼 ‘드르렁’ 코를 골고 자므로④.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스킨십’을 통해 영새와 채린의 연대감을 표현할까? 바로 ‘춤’이다. 춤은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상대와 대화하는 수단. 그러나 여기서도 채린은 가슴에 ‘옌볜 중학’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체육복을 입고 영새로부터 춤을 배운다⑤. 즉 춤을 배우는 단계에서부터 채린은 영새의 ‘학생’임을 분명히 하는 것. 편의점에서 과자를 잔뜩 고르는 채린의 모습⑥을 끼워 넣은 것도 이런 ‘애 만들기’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업히기’도 ‘어린신부’⑦에 이어 또다시 등장한 문근영 특유의 접촉(?) 방식. 어른 흉내 내려고 하이힐을 신었다가 발목이 삐끗한 채린을 영새가 업고 걷는다⑧. 문근영에게 ‘업히기’는 ‘약자’로서의 수동적인 자기 지위를 확인시켜 주는 장치다.

‘국민 여동생’이란 애칭까지 얻은 문근영. 하지만 나는 그 ‘국민’이 이젠 문근영을 좀 놓아 주었으면 한다. 문근영이 더 이상 착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고, 귀엽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배신하더라도, 야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