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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영화파일]그레그 마크스 감독의 ‘pm 11:14’

입력 | 2005-05-27 04:11:00


달리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오줌을 갈기던 남자는, 차가 사람을 들이받고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창틀에 끼어 그만 자신의 ‘물건’이 싹둑 잘리게 된다. 이 남자는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갑작스러운 사고에 우왕좌왕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나, 이렇게는 못살아. 정말 못살아!”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이 남자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잘린 채로는’ 살 수 없다는 것, 한마디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 현장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그 ‘물건’을 빨리 찾아와서 봉합을 시켜야 한다는 얘긴데, 아뿔싸 이들의 차는 이미 현장에서 멀리 벗어난 지 오래다. 누군지 모를 사람을 들이받고는 냅다 도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밤 11시 14분. 사람들의 마음에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시간이다. 그래서 사고치기 딱 알맞다. 영화 ‘pm 11:14’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결국 이 시간에 대형사고를 친다. 외견상 어떤 인물들은 우연히 사고에 휩싸이는 것 같지만 찬찬히 더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일으키는 욕망의 범죄 행위에는 사실상 우연이란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m 11:14’의 줄거리는 몇 마디 혹은 몇 줄로 명쾌하게 정리하기 힘들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두 건의 교통사고와 다섯 건의 범죄를 시간 순으로, 혹은 사고와 사고 사이에 엮어져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로 쉽게 정리해낼 수 있는 사람은 머릿속 논리구조가 매우 뛰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사건을 씨줄날줄로 잘 엮어놓았으며 그건 곧 25세 한창의 나이인 그레그 마크스란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있어 비상한 재주를 지녔고 또 연출력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들톤이라는 미국의 불특정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시작한다. 음주상태에서 차를 몰던 잭은 한 젊은 남자를 차로 치게 된다. 사고 시간 밤 11시 14분. 같은 시간에 더피란 남자는 애인의 임신 중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권총강도 짓을 벌이는데 알고 보니 이 범죄, ‘짜고 치는’ 것이다. 역시 같은 시간에 자신의 망나니 딸을 애지중지하는 중년의 프랭크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기가 죽이지도 않은 한 남자의 시체를 유기하느라 땀을 흘린다. 하지만 프랭크의 딸 셰리는 더블데이트로 만나고 있는 남자 중 한 명이 자신과의 정사 도중 죽어 버리자 나머지 한 명에게 그 일을 덮어씌울 생각에 한창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이 영화가 재밌고, 우습고, 기가 막히다가 결국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것은 이들 사고의 주인공들이 이렇게든 저렇게든 모두 한 묶음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쾌락을 좇는 중이다. 돈과 섹스와 술과 의도적인 소란 행위, 은밀한 엿보기와 진실 은폐에 대한 욕구가 이들을 지배한다. 여기엔 우리들 사회가 그토록 자랑하고 뻐기던 도덕률이나 사회적 규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오래 전에 자동 조절 능력과 장치를 상실한 지 오래라고, 마크스는 깔깔대며 비웃는다.

마크스 감독은 ‘퍼니 게임’이나 ‘피아노 티처’등을 만들었던 독일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을 떠올리게 한다. 하네케 감독이 무너져 가는 인류사회의 모습을 잔인할 만큼 극단의 차가운 시선으로 그려냈다면, 마크스 감독은 이미 무너진 사회 속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하네케 감독과 달리 마크스 감독에게 웃음이 있는 이유는 글쎄,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미 복구하기 어려운 세상 뭐 그리 안달복달하느냐는 것이다. 시종일관 마크스 감독과 함께 낄낄대다가도 결국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하기야 그런 마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pm 11:14’는 요즘 영화론 보기 드물게 85분짜리다. 15세 이상. 6월 2일 개봉.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