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이론, 그 후 100년/정재승 외 지음/316쪽·1만원·궁리
《빛은 입자(粒子)인 동시에 파동(波動)이라고?
대체 그 어떤 것이 대단히 작은 공간에 한정된 입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광대한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파동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상대성이론을 접한 물리학자들은 이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는 자신들의 능력에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그것은 절망적인 역설처럼 보였다. 상대성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지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서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였다. 과학자들은 마치 땅이 꺼져가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의 수학적 형식에 친숙해진 뒤에도 그들의 직관은 여전히 4차원의 시공(時空)을 소화하지 못한 채 겉돌아야 했다. ‘빛의 속도에 가깝게 달려야만 열리는 세계’는 인류의 본성에서 저만큼 비켜 서 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지 꼬박 100년이 흘렀다.
‘물리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론’은 빛의 속도로 20세기를 관통하며 시대의 문화와 격렬히 충돌했다. 우리는 아직도 상대성이론의 자장 속에서 동요하고 있다.
상대성이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존재’ 형식에 대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에너지와 물질은 그 주위의 시공에 어떻게 휘어져야 하는지를 지시하고, 휘어진 시공은 그 속의 에너지와 물질에 어떤 경로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말해준다.”(존 휠러)
현대문명이 아인슈타인의 어깨 위에서 건설되었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지만 상대성이론의 함의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인슈타인 스스로 “세상에서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열두 명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래로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고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물질보다 더 근원적인 신의 영역에 속하는 그 무엇이었다.
뉴턴역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이었으나 상대성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왕래한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를 넘나드는 단지 단위가 다른 물리량인 것이다.
국내 각계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 15명이 함께 쓴 이 책은 과학의 경계를 넘어 상대성이론의 인문 사회학적 의미를 폭넓게 탐구하고 있다.
상대성이론에 덧씌워진 천재성과 창의성의 베일을 들춰내며 그것이 우리 삶의 문화와 어떤 접점을 갖고 있는지 꼼꼼히 가늠해 본다.
상대성이론은 철학이나 예술과 같은 분야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중력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해 골몰하던 1907년, 우연의 일치일까,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 피카소는 캔버스 위에서 19세기 세계관으로부터 ‘유체이탈’을 시도하고 있었다.
현대 회화의 새 장을 연 입체주의는 시간과 공간의 맞물림을 미적 표현의 핵심으로 밀고 나간다.
피카소는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하나의 고정된 시점(視點)을 버리고 공간을 옮겨가면서 포착한 파편적 시각(視覺)들을 하나의 화면에 조합하였다. 공간에 함축된 시간의 궤적을 뭉뚱그렸다. 2차원의 평면공간에서 시간은 흘러내렸다. 시공은 결합됐다.
나아가 ‘감각의 야만인’이었던 미래주의 화가들은 선언한다. “질주하는 말의 다리는 네 개가 아니라 스무 개다!”
대상의 객관적이고 고정된 실체에 집착하던 사실주의에서 주체의 상대적 시점을 강조하는 표현주의로의 이월(移越)이었다. 상대성이론은 그 역사적 계기였다.
물리학과 캔버스에서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기댔던 유클리드 기하학은 파기되었다.
사진 기술은 아예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한 시간개념을 불러온다. 움직이는 피사체의 정지 순간을 잡아낸다거나, 1초 동안의 움직임을 분해해서 보여준다거나, 물방울이 튀는 순간을 6000분의 1초로 찍는다거나, 밤하늘의 별들이 움직인 궤적을 보여준다거나.
이들 사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늘어나고 때로는 줄어든다. 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시간 지연과 거리 축소 현상이다.
레이저를 이용해 사진에 담긴 2차원 정보를 3차원으로 재생하는 홀로그램은 그 극단의 세계다. 홀로그램 영상은 과연 물질인가 비물질인가. 단지 생각과 느낌만으로 빚어지는 이 물리적 현상은 대체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측정할 수 없는 그 무엇도 과학이 아니며 계량할 수 없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라던 고전물리학은 이렇게 붕괴되었다. 고전물리학은 이제 단지 현실세계의 ‘근사치(近似値)’로 치부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굳이 상대성이론을 따르지 않더라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여전히 4차원의 시공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지구라는 거대한 풍선의 한 점에서 웅크리며 살고 있는 한, 뉴턴 물리학의 근사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공간이거나 원자세계에서만 이 근사치의 오류는 의미를 갖는다.
“지구 전체의 면적을 재려는 사람에게 지표면은 하나의 구체(球體)일 터이지만 집터를 재는 사람에게 지표면은 여전히 평면인 것이다.”(에른스트 마흐)
이기우 문화전문 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