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색 잔디 옆/키위색 장다리 밭에/병아리색 나비들이 노닌다.’
‘초록색 잔디 옆/연둣빛 장다리 밭에/노랑나비들이 노닌다’라는 시 구절을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의 국가규격에 따라 이렇게 바꿔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과거에 축적된 언어관습과 시각 경험의 관성 때문이리라.
‘실생활에서 빈번히 사용되며 색채 연상이 쉽다’고 해 루비색 사과색, 또 최근 ‘식생활 변화에 따라 자주 사용된다’고 해서 키위색 멜론색 토마토색 모카색 등등. 많기도 한 42개 색 이름이 색채표준에 새로 추가됐다는 발표가 있었다.
한편 사용 빈도가 낮다는 올드로즈색, 꼭두서니색, 머룬색 등과 일본식 색 이름이라는 연단색, 금적색, 금갈색 등 67개 색 이름은 표준에서 제외됐다. 솔직히 색채와 긴밀히 접하는 필자도 몰랐던 ‘생뚱맞은’ 이름이 대부분이다.
요즘 한창 기승을 부리는 일제 잔재 청산을 색채 세계도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우선 ‘색 이름’과 ‘색상(色相)’은 정확히 같은 동의어임에도 이를 혼동한 당국의 인식부터가 문제다. ‘산업에서 색 이름과 연상(聯想) 색상의 차이로 인해’라는 대목이 이를 보여 준다. 이는 ‘색 이름(색상)과 연상 색의 차이’로 표현해야 옳다. 색상이란 특정색의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관용색 이름 변경으로 언어, 문자적 커뮤니케이션 불편이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낙관적 공상일 뿐이다. 시각언어에는 대다수 사용자의 오랜 관행을 단기간에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생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바뀐 것을 보면 루비, 모카, 멜론 등 외래어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난생 처음 듣는 ‘버프색’은 ‘가죽색’으로 개명하기로 했다는데, 도대체 ‘버프’는 무엇이고 가죽색이 어디 한두 가지뿐인지 딱한 노릇이다. ‘병아리색’만 해도 진노랑과 연노랑 중 어느 것인지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색채의 본질을 규정하는 잣대는 색의 밝기를 규정하는 명도, 색다운 정도를 가리키는 채도, 색 이름을 지칭하는 색상 등을 ‘색의 3속성’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색채 이름 표기는 색채 문제에서 그 한 부분인 색상의 영역에 국한되는 셈이다.
사람의 이름이나 물건의 명칭도 자주 바뀌거나 갑자기 달라지면 학습의 과정에서 혼돈의 대가를 겪게 된다. 색채의 경우도 색 명칭, 즉 색상의 급격한 인위적 변화가 실생활에서 크나큰 혼란을 가져와 결국 언어, 문자적 소통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이치다. 언어는 오랜 관습과 관행의 산물이며 이것을 공동의 약속에 따라 기호화한 것이 문자일 뿐이다.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색채 이름을 ‘개혁’하는 것도 문화의 흐름이라는 큰 틀 속에서 자연율에 맡기는 것이 순리다.
일제 잔재 청산이란 큰 그림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환골탈태의 몸부림은 격려할 일이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언어의 고유한 생리를 간과하고 인위적이고 급조하는 듯한 개정은 자칫하다간 기호표현체계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실효성 없는 일과성 개악으로 전락할 우려가 다분하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사물과 현상의 원초적 가치판단조차 혼란의 늪 속으로 함몰되는 요즘의 세태에서, 색 이름까지 헷갈리게 만드는 해괴한 언어 관습의 평지풍파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 같다.
유한태 숙명여대 교수·디자인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