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룩해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그의 등판을 굄대 삼아 오른쪽에는 코끼리가, 왼쪽에는 당나귀가 시소를 타고 있다. 코끼리와 당나귀의 체구는 잠들어 있는 남자보다 작다. 하지만 큰소리로 상대를 비난하며 삿대질하는 이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한 시사 잡지가 미국 정치판을 묘사한 삽화다. 코끼리는 공화당, 당나귀는 민주당의 상징물이다. 덩치 큰 남성은? ‘무기력한 다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워싱턴 정가의 드잡이 싸움에 싫증난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 남자’를 잠에서 깨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직 구체적 움직임은 없다. 미국 신문을 펼쳐들면 이따금 눈에 띄는 독자편지에서 이런 기류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좌도 우도 아닌 우리의 정치적 목소리가 신문에 안 보인다”는….
이들의 바람은 간명하다. 성서(聖書) 원리주의로 무장한 채 관용에 인색한 공화당이나, 사회적 약자보호를 말하면서도 귀족주의에 빠진 민주당 지도부를 대체할 ‘누군가’가 나와 줘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철인(哲人)을 기다리는 것처럼.
올 2월 출간된 존 K 갤브레이스의 평전(評傳)은 갤브레이스가 그 철인의 존재를 ‘선한 정부’에서 찾았다고 해석했다. 평전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선한 의지를 갖추고, 그 의지를 현실에서 관철시킬 능력을 갖춘 정부만이 사회적 정의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갤브레이스는 1930∼60년대 정치 경제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던 사상가이자 적극적 현실참여파였다. 그런 만큼 그의 난해한 이론이 800쪽 곳곳에 녹아 있는 이 책은 대중적 관심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언론은 서평과 지상논쟁을 통해 그의 존재를 논쟁의 장에 부활시키려 애썼다. 갤브레이스의 사상과 정책 속에서 ‘말없는 다수가 기대하는 바’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 언론의 그런 관심은 23일 연방법원 판사 임명을 둘러싼 공화·민주당의 이전투구에 반기(反旗)를 든 14명의 상원의원에게 옮아가고 있다. 그들이 과연 말없는 다수가 기다리고 있는 ‘그 누군가’일 수 있을까.
이들은 국민의 기대와 무관하게 “의회 제도를 바꿔서라도 연방법원 판사임명안을 우리 뜻대로 관철하겠다”는 공화당과 “밀리면 끝장이다. 의회정치 중단도 불사한다”는 민주당 지도부에 경종을 울렸다.
반(反)조지 W 부시 정서가 강한 주류 언론은 이들을 ‘14인의 갱’으로 부르며 힘을 몰아줬다. 이들의 좌장은 존 매케인(공화) 상원의원. 그는 미국인들에게 정치인의 올곧은 소신과 신념의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온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말 없는 다수’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는 아직 점치기 어렵다. 그만큼 30년간 진행된 미국 보수화의 현실적 힘은 막강하다. 당장 6월 중에 존 볼턴 유엔대사 내정자에 대한 표결처리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반기가 일회성 해프닝에 그칠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미국인의 희망은 쉽사리 꺾일 것 같지 않다.
김승련 워싱턴특파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