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행담도 현장조사한나라당 ‘행담도 의혹 진상조사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31일 충남 당진군 행담도 개발사업 현장을 방문해 사업 진행상황을 브리핑 받고 있다. 당진=국회사진기자단
《2003년 중반 어느 날, 정찬용(鄭燦龍) 당시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인사 관련 보고를 하러 들어가자 노 대통령은 대뜸 “국토균형발전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위해 낙후된 호남, 서남해안 지역을 개발해야 한다”면서 그에게 서남해안 개발 구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정 전 수석은 “인사 관련 일도 바쁘다”며 고사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며칠 뒤 정 전 수석과의 조찬자리에서 다시 서남해안개발 얘기를 꺼냈다. 인사수석이 할 일은 아니지만 호남 출신이 맡는 게 좋겠다는 취지였다.》
국토개발 분야에는 문외한인 정 전 수석이 S프로젝트에 발을 담그게 된 최초의 경위는 이렇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그는 서울대 문동주 교수에게 용역을 의뢰했고, 문 교수를 통해 김재복 행담도개발㈜ 사장과도 접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자문위원회가 동원됐다. 정 전 수석은 “경제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이 일을 챙기다가 서남해안 개발 구상이 500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외자 유치 사업으로 발전하면서 동북아시대위원회로 바통이 넘어갔다.
행담도 개발사업의 자금 조달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김 사장은 정 전 수석과 동북아위 문정인(文正仁) 전 위원장 등과 접촉하며 행담도 개발사업과 관련한 민원을 해소하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김 사장은 캘빈 유 주한 싱가포르대사와의 친분 관계를 이용해 청와대를 9차례나 들락날락했다.
그는 한국도로공사 측과 자금 조달 문제로 마찰을 빚자 정 전 수석과 문 전 위원장 등에게 로비를 벌이기도 했고, 이에 청와대는 한 민간업자의 행담도 개발사업을 밀어주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의 탈피를 주창하고 ‘시스템 정부’를 공언하기도 했다.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최근 사석에서 “참여정부 출범 직후 노 대통령이 시화호 얘기를 꺼냈다. 실패한 정책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책의 최초 수립자에서부터 중간 결재자, 최종 결재자까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정책 결정과정의 투명성을 강조하더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정부의 경쟁력도 강조해 왔다. 노 대통령이 참여정부 2년차에 접어든 뒤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는 분권형 체제를 도입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면 대통령이 말한 새로운 국정운영 시스템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전문가인 인사수석에게 초대형 국책사업 구상을 맡긴 것은 스스로 국정운영 시스템을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공식적인 정책결정 라인은 밀려났다. ‘실세 총리’라는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조차도 행담도 개발사업과 S프로젝트 문제가 불거졌을 때 “S프로젝트가 서남해안 개발사업을 말하는 건가. J프로젝트(전남도가 추진해 온 호남개발사업)와는 다른 것인가”라고 간부들에게 물을 정도로 혼란스러워 했다고 한다.
동북아위를 비롯한 각종 대통령자문위원회가 ‘한건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으나 일선 부처는 이들의 위세에 눌려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 정부 부처 간부는 말했다.
한양대 예종석(芮鍾碩) 교수는 “노 대통령은 말로는 시스템 국정운영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일부 비선 라인과 아마추어들에게 국정의 주요한 부분을 맡기고 있음이 단적으로 드러났다”며 “통치(統治)도 아니고 협치(協治)도 아닌 인치(人治)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