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이 길을 잃었다. 집권한 지 2년 3개월이다. 온 만큼 더 가야 하건만 좀처럼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개혁의 열정도, 진보의 진정성도, 희망의 상상력도 ‘보이지 않는 길’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치열했던 싸움의 광장에는 비난과 조소(嘲笑), 탄식과 우려가 나뒹굴 뿐이다.
노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이는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완성했다는 자부(自負)이자 ‘기회주의적’ 주류 기득권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는 시대인식을 상징한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져 온 ‘1987년 체제’는 한국의 민주화를 한 단계씩 끌어올렸다. 그러나 386 운동권 그룹의 눈에는 여전히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의사(擬似) 민주화’였을 뿐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5공 세력과 손잡았던 YS(김영삼)는 말할 것도 없고 DJ(김대중) 역시 ‘유신 본당’인 JP(김종필)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거기에 비한다면 노 정권이야말로 ‘1987년 체제의 완결판’이 아니겠느냐고.
20세기 신생국가의 경제발전에는 독재가 불가피했다는 논리에 선뜻 손을 들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고속 성장이 민주화의 물적 토대가 된 것도 인정할 부분이다. 반면 박정희 체제가 빚은 반(反)민주의 해악과 그늘 또한 크고 깊다.
비극적인 사실은 한국사회의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박정희 사후(死後) 4반세기가 지나도록 화해하기 어려운 자기들만의 기억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잘살게 됐다는 ‘양(陽)의 기억’과 반민주 반인권 독재라는 ‘음(陰)의 기억’. 여기에 배타적 지역주의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면서 한국 사회의 분열은 고착됐다. YS, DJ 정권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 정권이 ‘1987년 체제의 완결판’으로 자부한다면 분열의 틀을 극복하는 국민통합에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와 대탕평(大蕩平)을 통해 국민의 에너지를 한데 모으려 애써야 했다.
그러나 노 정권은 통합보다 배제(排除)와 청산으로 방향을 잡은 듯하다. 하지만 편 가르기식 이분법으로 ‘정의’와 ‘기회주의’를 두부모 자르듯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10분의 1 부패’를 도덕성의 징표로 내세울 수도 없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극한은 곧 탄핵사태로 이어졌다.
위기는 기회였다. 수구 야당의 무리한 대통령 탄핵 시도는 노 정권이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행정 권력에 이은 의회 권력의 장악은 1987년 이후 어느 정권에서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호조건이었다. 그러나 노 정권은 밥상을 차려 준 국민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오늘의 민생보다는 과거사 청산에 매달렸다. 실용주의를 말하면서도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편향적 이념에 집착했다. 청와대와 여당이 당정(黨政) 분리를 내세워 따로 놀면서 국정은 흐트러졌다. 청와대 직할체제는 감시와 견제 밖에 있었다.
요즘 여당의 이미지라는 ‘무능 태만 혼란’은 곧 노 정권 전체의 이미지일 수 있다. 정권 실세(實勢)들이 판을 벌인 ‘오일게이트’와 ‘행담도 개발 의혹’은 바로 그것들의 집합이 아닌가.
세상은 일터에서 밀려난 중장년과 취업 못한 ‘청년 백수’로 넘쳐 나고, 빈부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경제부총리는 일본식 장기 침체의 가능성을 감추지 않는다. 노 정권도 이제 머지않아 하산길이다.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힘든 것이 산행이거늘 길마저 잃어서야 되겠는가. 빨리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독선과 오만의 덫에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당신들은 민주화를 완성한 것도, ‘1987년 체제’를 완결한 것도 아니다. 양김(兩金) 시대에 이은 또 하나의 과도기일 뿐이다. 그 사실부터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길이 보인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