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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06-02 03:28:00

그림 박순철


초나라 군중(軍中)으로 숨어든 한군 첩자들은 크게 두 갈래로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 한 갈래는 초나라 장수들의 마음을 패왕 항우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패왕은 종성(宗姓)인 항씨(項氏)들만을 믿어 타성(他姓) 장수들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종리매나 용저와 계포 등을 보아라. 오중(吳中)을 떠날 때부터 이날까지 개나 말보다 더 충직하게 패왕을 위해 싸웠지만 아무도 제후나 왕에 봉해지지 못했다. 천하가 평정된다 해도 항씨 아닌 장수는 아무도 제후나 왕에 봉해지지 못할 것이다.”

“패왕은 우(虞)미인에게 깊이 빠져 장차 그녀를 왕후로 세우려 한다. 그리고 우씨(虞氏)와 그 피붙이들을 처족(妻族)으로 여겨 곳곳에서 무겁게 쓰고 있다. 초나라의 장수는 무릇 항씨가 아니면 패왕의 처족이라도 되어야 앞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패왕이 천하를 얻는다 해도 결코 큰 광영을 기대할 수 없다.”

황금을 넉넉히 풀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산 뒤에 거짓과 참됨을 교묘하게 섞어 그렇게 수군거리고 다니자 항씨 아닌 장수들은 저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군 첩자들이 퍼뜨린 다른 한 갈래의 헛소문은 패왕으로 하여금 장수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종리매는 초나라 장수로서 어떤 제후나 왕에 못지않게 큰 공을 세웠으나, 땅 한 뼘 얻지 못하고 여전히 천한 몸종처럼 패왕 곁에서 부림을 받게 되자 마음이 달라졌다. 한왕 유방과 가만히 손을 잡고 패왕을 쳐부순 뒤에 천하를 나눠 가지기로 약조하였다고 한다.”

“용저는 구강(九江) 땅 때문에 심사가 틀어져 진작부터 한왕의 사람이 되어있다더라. 항성(項聲)과 더불어 경포를 쳐부수었으나, 패왕은 항백(項伯)에게 구강 땅을 주어 경포 대신 다스리게 하였다. 용저는 아직도 패왕에게 그지없이 충성스러운 체하지만 때가 오면 칼끝을 돌려 천하를 한왕 유방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한왕이 용저에게 구강왕(九江王)을 약속했다는 소문도 있다.”

“대사마 주은(周殷)도 이미 한군과 선이 닿아 있다고 한다. 형양성을 칠 때마다 앞장을 서는 것도 실은 패왕의 눈을 속임과 아울러 한군에게 넘어갈 때를 엿보기 위함이라 한다.”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말을 그럴듯하게 얽은 것이었는데, 특히 지독한 것은 아부(亞父) 범증에 관한 것이었다.

“범증은 스스로 옛 초나라 유신(遺臣)을 자처하였고, 항량으로 하여금 양치기 중에서 왕손(王孫)을 찾아 초왕(楚王)으로 세우게 한 것도 그였다. 항왕이 진나라를 쳐 없애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었을 때도 초왕을 지켜내었으며, 마침내는 의제(義帝)로 높여 세우게까지 했다. 그런데 항왕이 의제를 장사(長沙)로 내쫓아 죽이자 범증은 마음이 변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여전히 항왕 곁에 붙어 꾀를 짜내고 있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하루빨리 항왕을 죽여 의제의 한을 풀어줄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방금 항왕으로 하여금 형양성을 에워싸게 한 일도 그렇다. 가까이 있는 적은 제쳐놓고 멀리 있는 한왕을 쫓아 수천리 길을 오게 한 것은 항왕의 세력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리고자 함이나 다름없다. 거기다가 강한 적이 굳게 지키는 성을 지친 군사로 거듭 무리하게 치도록 몰아대는 것은 하루빨리 초군의 기력을 떨어뜨려 한군에게 반격할 틈을 주려는 속셈이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