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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남극의 공포’ 말이 앞섰다

입력 | 2005-06-02 03:28:00


‘남극일기’의 시도는 빛난다. 90억 원의 제작비를 쏟아 부은 배포 큰 영화인데다, 국내에선 최초로 남극을 배경으로 해 만든 스릴러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기(動機)의 순수성이 흥행을 보장하진 못하는 법. 이 영화는 개봉(5월 19일) 후 보름이 거의 다 돼서야 관객 100만을 넘어섰다.

영화를 보고난 관객의 의견은 두 가지 점에서 일치했다. 하나는 “송강호 유지태의 연기가 끝내줬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영화가 너무 단순하더라”는 것. 인간의 서로 다른 욕망이 뒤엉키고, ‘살부(殺父) 심리’까지 숨어 있는 이 ‘깊은’ 영화가 왜 관객의 눈에는 ‘얕게’ 보인 걸까. 대사의 관점에서 그 이유를 풀어 봤다.

이 영화의 주제는 ‘인간의 정복욕이 남극을 공포의 대상으로 변질시켰다’는 것. 하지만 이 영화는 남극의 공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공포를 ‘보여주기’보다는 그냥 ‘말해’ 버리는 것. 이 영화 속 내레이션의 주인공인 탐험대 막내 민재(유지태)는 관객의 입장과 시각이 되기보다는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해 주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쏟아낸다.

“우리 모두가 외계 혹성 한복판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랄까. 저 위에 누군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나만의 느낌일까.”(시작 0:12)→“남극엔 바이러스가 없는데 재경 선배는 꼭 감기 걸린 사람 같지 않아요?”(0:30)→“남극의 흰색이 나를 마비시킨 걸까. 그 순간 난 그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0:42)→“사람의 눈으로 본 건 다 믿을 수 있는 건가요?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어떤 상황이나 환경 때문에 꼭 뭐에 홀린 것처럼 착각을 할 수도 있는 거겠죠?”(1:00)→“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남극의 이상한 기운이 우릴 감싸고 있다.”(1:05)→“도달불능점은 없어. 있다고 해도 당신을 받아줄 리 없단 말이야.”(1:35)

게다가 민재는 “우리의 욕망이 여기를 지옥으로 만들었다”(1:32) “도대체 이게 뭐예요. 여긴 그냥 땅에 찍힌 한 점일 뿐이라고요”(1:40)라며 주제를 완전 요약해 주입해 주기까지 한다. 이런 ‘잔소리’는 대원들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정복욕에 미친 최도형 대장(송강호)의 편을 들다가 중반 이후 돌아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부대장(박희순)도 마찬가지다.

“그게 기적이 아니라 저주라고 생각 안 해 봤어요?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버텼던 것뿐이라고요.”(1:10)→“우리도 (욕망에 죽어간 영국 탐험대의 시체를 가리키며) 저렇게, 저렇게 될 거야.” “남극이 대장을 미치게 만든 거야.”(1:30)

관객이 공포를 채 체감하기 전에 그 공포의 정체를 요약해 ‘떠 먹여’ 주는 탓에 관객은 영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등장인물들이 주제를 그대로 말해버리는 대목들을 점으로 표시해 보면, 클라이맥스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주제가 대사를 통해 너무 많이 노출돼 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래픽).

‘남극일기’는 ‘386 정치인’들을 빼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 보여 주는 것보다 너무 많이 말해버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스크린에서나 일상에서나 우린 아직도 ‘의미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