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의 용량이 2년에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흔들리고 있다. 인텔 명예회장인 고든 무어가 1965년 제시한 이 법칙은 기술 발전 속도를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정설로 평가받아 왔다.
‘무어의 법칙’이 도전을 받게 된 이유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가 40년 전에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빨라지고 있기 때문.
‘무어의 법칙’을 대신할 유력한 후보가 ‘황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황창규(黃昌圭)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이 2002년 ‘반도체 용량이 1년에 2배로 성장한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나왔다.
특히 반도체 메모리뿐 아니라 휴대전화 벨소리나 카메라폰의 화소,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용량, 액정표시장치(LCD)의 크기 등도 1년에 2배로 증가하는 추세가 보여 주목된다.
○ ‘황의 법칙’을 따르나
각종 텍스트와 동영상, 음악 파일 등 데이터를 저장하는 플래시메모리는 1998년 128Mb(메가비트)에서 2004년 8Gb(기가비트)까지 1년에 2배로 정확히 늘었다. ‘황의 법칙’은 원래 이 플래시 메모리의 성장 속도를 보고 나왔다.
데스크톱PC나 노트북PC에 들어가는 HDD의 용량이 커지는 추세도 대략 1년에 2배라는 공식을 따르고 있다. 많이 쓰이는 3.5인치 HDD의 용량은 1990년 0.32GB(기가바이트)에서 2000년 73GB로 증가했다. 최근에는 400GB까지 등장했다. 2.5인치와 1인치 HDD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HDD의 용량은 헤드 크기에 반비례한다. 박영필(朴寧弼·기계공학) 연세대 교수는 “1990년대 초 거대 자기저항 헤드가 개발되면서 HDD의 데이터를 읽고 쓰는 헤드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기 때문에 용량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컴퓨터의 ‘얼굴’인 LCD의 크기도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LCD는 보통 커다란 원판을 만들어 이를 여러 개로 자르는 공정을 거친다. 원판의 크기에 따라 세대가 나뉘는데 원판의 면적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약 2배로 늘었다. 1세대(270×360mm)에서 시작해 최근의 7세대(1870×2200mm)에 이르렀다.
인터넷 트래픽(데이터 교환량) 역시 평균적으로 보면 지난 30년간 매년 2배로 성장했다. 인터넷 도메인이나 이용자 역시 ‘닷컴 열풍’이 불던 199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 평균 1년에 2배로 성장했다.
○ 휴대전화는 ‘황의 법칙’의 집합체
휴대전화의 진화는 ‘황의 법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먼저 벨소리. 2000년 4화음으로 ‘따르릉’ 시끄럽게 울리던 벨소리는 16화음(2001년), 40화음(2002년), 64화음(2003년)으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우아한 클래식과 최신 유행가도 얼마든지 담을 수 있게 됐다.
카메라폰의 화소 수 역시 1년에 약 2배로 증가한다. 2000년 35만 화소이던 것이 2003년 130만 화소가 됐고 2004년에는 300만∼500만 화소로 늘었다. 삼성전자는 올해 700만 화소 카메라폰을 발표했다.
이미지센서 개발기업인 엠텍비젼의 이주석(李柱石) 연구소장은 “이미지센서에 광(光)다이오드를 많이 집적할수록 화소수가 많아진다”며 “반도체 기술과 마찬가지로 이미지센서의 집적도가 매년 2배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MP3플레이어 역시 ‘황의 법칙’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장진(張震·정보디스플레이공학) 경희대 교수는 “화면이 달린 MP3플레이어가 등장하게 되면 휴대용이라는 특성상 크기는 계속 늘어날 수 없지만 화면의 화소 수는 ‘황의 법칙’에 따라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현대원(玄大原·신문방송학) 서강대 교수는 “사람들은 항상 더 빠른 속도와 더 많은 용량을 원한다”며 “최근 디지털 기기의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것은 이런 수요에 맞추기 위해 기술 발전 속도가 계속 빨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에는 PC가 가장 보편적인 정보기술(IT) 기기였다. 사람들은 당시 2∼3년에 한 번씩 PC를 업그레이드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휴대전화가 PC의 자리를 차지했다. 휴대전화 교체 주기는 1.5년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경전(李京全·경영학부) 경희대 교수는 “‘황의 법칙’은 디지털 기기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유용한 법칙”이라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조준일(趙埈一) 부연구위원도 “‘황의 법칙’이 ‘무어의 법칙’을 대신해 디지털 기기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준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디지털 세계의 다양한 법칙들▼
우주에 다양한 물리 법칙이 있는 것처럼 디지털 세상에도 다양한 법칙이 있다.
‘무어의 법칙’과 함께 잘 알려진 법칙 중 하나가 ‘메칼프의 법칙’. 미국 3콤의 창업자인 로버트 메칼프는 1985년 “네트워크의 가치는 네트워크에 연결된 참가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주장을 폈다. 회원이 10명인 웹 사이트에 1명이 더 들어오면 네트워크의 비용은 10에서 11로 10% 늘지만 웹 사이트의 가치는 100(10의 제곱)에서 121(11의 제곱)로 21% 증가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나온 ‘가치사슬(Value Chain)의 법칙’은 ‘무어의 법칙’, ‘메칼프의 법칙’과 함께 ‘인터넷 경제 3원칙’으로 불린다. ‘조직은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 적게 드는 쪽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수직적으로 통합해야 거래비용을 줄인다고 여겼지만 인터넷이 보편화한 지금은 핵심 역량이 아닌 기능은 아웃소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많은 기업이 기능을 떼내 분사(分社)시키는 것은 이 법칙을 따른 것이다.
‘수확체증의 법칙’은 인터넷 세계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따르면 경제는 투입이 늘면 늘수록 수익의 증가 속도는 떨어지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은 반대다.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한 번 균형에서 벗어나면 이탈 정도가 오히려 가속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두 법칙은 공존하는데 일반적으로 수확체감의 법칙은 전통 제조업에서, 수확체증의 법칙은 하이테크 산업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매크론의 법칙’은 개인용컴퓨터(PC) 시장에서 나타났다. PC는 성능이 아무리 좋아져도 가격은 늘 5000달러(500만 원)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1984년 나온 이 법칙은 1990년대 초 PC 가격이 3000달러(300만 원)로 떨어지기 전까지 들어맞았다.
디지털 세계가 모두에게 장밋빛은 아니다. 반도체의 용량은 ‘무어의 법칙’에 따라 2년마다 용량이 2배로 늘어났지만 벤처 투자가인 아서 록의 이름을 딴 ‘록의 법칙’에 따르면 제조설비 비용도 4년에 2배로 증가했다. 웬만한 기업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엄청난 설비 투자비용 때문이다.
김상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dre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