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고승(高僧) 같은 시인을 잃어버린 마음, 나의 마음은 텅 비어 있다.”
소설가 박종화는 벗을 떠나보내며 극진한 경외(敬畏)를 담은 글을 신문에 실었다. 당시 국민회당(현재 서울시의회)에서 치러진 이 ‘고승 같은 시인’의 영결식에 문인과 승려, 학생과 시민이 몰려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허무주의 서정과 웅장한 사상을 겸비한 예언자적 시인으로 평가받는 그는 1963년 6월 3일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등단해 숱한 시를 썼지만 생전에 자신의 시집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자신을 비우고(공·空) 세상을 초월(초·超)’한다는 뜻에 걸맞은 삶이었건만 지인들은 그를 ‘꽁초’ 내지 ‘골초’라 불렀다. 아침에 일어나 붙인 담뱃불을 잠자리에 들 때까지 꺼뜨리지 않았다는 그는 ‘금연’이란 단어가 싫어 극장 따위엔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흡연은 이른바 ‘뻐끔담배’였다고 전해진다. 니코틴을 탐닉했다기보다는, 명멸하는 인생과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동일시하는 시인의 화두(話頭)였다는 것.
그 화두를 잡고 사는 듯 공초는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했다. 가족도 집도 없었다. 사찰을 돌아다니다 말년에는 조계사의 가건물 골방에서 묵었다. 눈을 뜨면 연극인 이해랑이 운영하던 명동 청동다방에 ‘출근’했다. 그를 찾아온 시인 지망생들을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고 반기며 문학과 인생을 논했다. 벗들은 폴몰 담배를 한 보루씩 사들고 찾아와 토론을 벌였다. 그는 ‘명동 시대’의 낭만을 상징했다.
공초는 다방을 찾는 이에게 노트를 내밀어 글쓰기를 권했다. 이른바 ‘청동산맥’이라 불리는 일종의 잠언록을 만들어 나간 것. 총 195권에 달하는 이 기록에는 당대 지식인의 멋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 이은상은 여기에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라는 촌철살인의 인물평을 적었다.
그의 죽음은 고독했다. 그나마 병실을 지키던 제자들조차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유언도 없이 속세의 끈을 놨다. 그를 아낀 문인들은 북한산 언저리에 마련된 묘비에 새길 시로 ‘방랑의 마음’을 골랐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나의 혼(魂)…….’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