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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 동트기 전

입력 | 2005-06-06 03:03:00

그림 박순철


태뢰(太牢)는 제사나 잔치에서 세 가지 희생, 곧 소와 양과 돼지의 고기를 두루 갖춘 음식을 말한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자는 매일 태뢰를 먹고 제후는 소뢰(少牢)를 먹으며 대부는 세 가지 희생 중에 하나(特牲)만을 먹는다고 한다. 또 제사에서는 제후와 천자를 모시는 대부가 다 태뢰를 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진나라가 옛 법을 모두 없애버린 그때는 여러 가지 고기가 갖춰진 풍성한 상은 대강 태뢰라 불렀다.

초나라 사자는 태뢰를 갖춘 상을 받게 되자 더욱 얼떨떨해졌다. 한나라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토록 융숭하게 대접하는지 궁금히 여기며 자리에 앉는데 한왕이 불쑥 물었다.

“그래, 아부(亞父)께서는 무양하시오?”

“예.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말을 타고 행군하시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얼결에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사자는 괴이쩍은 기분이 들었다. 한왕이 패왕을 제쳐놓고 범증의 안부부터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왕이 다시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졌다.

“아부께서는 이번에 무슨 일로 그대를 보낸 것이오? 초나라 군중에 무슨 일이 있소?”

그제야 이상한 느낌이 든 사자가 쭈뼛거리며 받았다.

“저는 아부께서 보낸 사자가 아니라 패왕께서 보내신 사자입니다.”

그러자 한왕의 낯빛이 싹 변했다. 한동안이나 놀라 넋 잃은 사람마냥 서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과인은 그대가 아부의 사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항왕이 보낸 사신이었구려!”

그러더니 마침 뒤따라 들어오는 진평을 보고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항왕의 사자라면 경이 알아서 접대해 보낼 것이지 어찌하여 과인에게 데려왔소? 하마터면 아부의 사자인줄 알고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쏟아낼 뻔하였소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한왕은 시중드는 이들에게도 핀잔주듯 말했다.

“상을 거둬라. 손님을 잘못 알아보았다. 너희들은 아무에게나 태뢰를 갖춰 내느냐?”

그리고는 초나라 사자를 두 번 다시 거들떠보는 법도 없이 그 방을 나가버렸다. 한왕이 나가자 시중드는 이들은 일껏 차리던 태뢰 상을 거두고 보잘 것 없는 나물 요리(惡草具)로 바꾸었다.

사자는 한왕의 그같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얼음물이라도 한바가지 뒤집어쓴 듯하였다.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데, 진평이 능청스럽게 상 맞은편에 앉으며 초나라 사자에게도 앉기를 청했다.

“우리 대왕께서 워낙 숨김이 없는 성품이라…그리고 우리 대왕과 아부의 내왕을 너무 괴이쩍게 생각하지 마시오. 군진(軍陣)을 마주하고 있어도 사자는 오가는 법이오.”

진평이 그렇게 말하자 초나라 사자가 같이 능청을 떨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한왕께 사자를 보내는 이가 어찌 범(范)아부 한 분뿐이겠습니까? 종리매나 용저 같은 장수들도 여럿 한왕과 내왕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초나라 사자는 그렇게 슬며시 진평을 찔러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범증 말고도 한왕과 연줄이 닿아 있는 초나라 장수들까지 모두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진평이 그런 사자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로 따져보는 기색 없이 그 말을 받았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