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는 자신에게 “고통은 비타민”이라고 했다.
실패와 좌절은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믿음으로 견뎌낸다는 것이다.
통산 100승은 역경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정신력의 산물이다.
박찬호는 야구 인생의 출발부터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공주에서 ‘전파사집 아들’로 불린 그는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지만 손가락이 길다는 이유로 글러브를 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야수였다가 공주중에 입학해 투수로 전업했다. 숫기가 없어 일부러 여자친구를 사귀어보고 한밤에 공동묘지를 자주 찾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공주고에선 구속이 시속 150km대에 이르러 주위의 관심을 끌었지만 신일고 조성민(한화), 휘문고 임선동(현대) 등 화려한 경력의 서울 동기생에 가려 스스로를 그저 ‘촌놈’이라고 부르는 미완의 대기였다.
이런 박찬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한양대 2학년 때인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최고 시속 156km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을 매료시킨 것.
이듬해 그의 성장 가능성에 눈독을 들인 LA다저스와 계약한 뒤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미국 무대는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혹독한 시련만 맛본 채 데뷔전 이후 17일 만에 마이너리그로 추락. 그리고 2년 동안 햄버거와 콜라로 끼니를 때우며 외롭고 낯선 객지 생활 속에 빅리그 마운드에 다시 설 날을 꿈꾸며 땀을 쏟았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했던가. 박찬호는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컵스전에 구원 등판해 메이저리그 첫 승을 따낸 것을 신호탄으로 승승장구했다. 1997년 14승을 시작으로 2000년 18승을 포함해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 자리 승수. 2001년 말에는 5년간 6500만 달러의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에 입단했다. 세상을 모두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3년 동안 부상과 슬럼프에 빠지면서 텍사스에서 고작 14승을 거두는 데 그쳤다. 미국과 한국에선 이구동성으로 ‘한물 간 게 아니냐’, ‘이젠 끝이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동료들의 불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박찬호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며 묵묵히 재활에 매달렸다. 지난해에는 3개월이 넘는 마이너리그 재활투구 끝에 간신히 빅 리그에 복귀한 뒤 심한 스트레스에 따른 원형 탈모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완전한 컨디션 회복을 위해 허리 치료에 전념했고 지난해 말 완쾌를 확인한 뒤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각오 속에 동계훈련에 공을 들였다. 강속구 대신 주무기인 투심 패스트볼을 앞세운 제구력과 변화구 위주로 노련미를 한층 보강했다.
결국 박찬호의 올 시즌 부활과 대망의 100승 달성은 끊임없는 고난의 시간을 극복한 노력의 결정체였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박찬호 얼마나 벌었나▼
1994년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촌놈’ 박찬호는 계약금, 연봉, 인센티브 등 그라운드 안에서 벌어들인 수입만도 8390만 달러(약 839억 원·5년 계약 마지막 해인 2006년 연봉 1500만 달러 포함)에 이를 전망이다. 그동안 달러당 원화환율이 많이 떨어졌지만 평균 1000원으로만 환산해도 840억 원에 이르는 액수다.
박찬호는 이 중 30∼40%에 이르는 미국 세금과 에이전트 수수료 5%를 빼더라도 순수입으로만 500억 원은 족히 챙겼다. 웬만한 1인 벤처기업인 셈.
‘회장님 박찬호’는 마이너리그 시절인 1994년 첫 연봉이 1만7000달러로 국내 대졸 초임 수준에 머물렀지만 자유계약선수(FA)가 돼 텍사스와 5년 계약한 2001년부터는 평균 1300만 달러를 벌어 불과 7년 만에 765배의 초고속 성장을 했다.
100승을 달성한 6월 현재 총수입은 내년과 올 7월 이후 연봉을 빼더라도 6000만 달러 수준. 따라서 박찬호는 그동안 1년 평균 53억 원에 1승당 6억 원, 한 경기 등판할 때마다 승패에 관계없이 2억1400만 원, 트레이드마크인 삼진 1개당 4458만 원, 1이닝 던질 때마다 3950만 원, 투구수 1개당 238만 원을 버는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했다.
올해 들어 재기에 성공한 박찬호로선 내년 시즌이 끝나면 다시 한번 FA 대박이 예상돼 총수입은 1억 달러를 훌쩍 넘길 전망이다.
박찬호는 버는 만큼 쓰는 손도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서울 강남에 120억 원을 들여 13층짜리 빌딩을 신축 중이며 초창기 시절인 1997년 ‘박찬호 장학회’를 설립해 해마다 20여 명에게 1억 원대의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또 루게릭병 홍보대사를 맡고 있으며 실직자 가정 자녀 돕기 등 사회사업에도 큰 관심을 쏟고 있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