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갈피 속의 오늘]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입력 | 2005-06-06 03:03:00


희뿌연 새벽, 거세게 흔들리는 보트 위에서 구토를 하며 해변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표정엔 두려움이 가득하다. 상륙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이들을 맞이한 것은 독일군의 빗발치는 총격. 지옥의 문이라도 열린 듯 피가 튀는 아비규환의 전투가 시작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시작하자마자 처음 25분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준 충격적인 전쟁 장면은 1944년 6월 6일 단행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격렬했으며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오마하 해변 상륙 전투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전기를 마련한 ‘지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5곳의 해변에서 동시에 전개됐으며 연합군은 이날 하루에만 항공기 1만3000대, 함정 6000척을 동원해 7개 사단 병력을 프랑스 북서부 해안인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이 작전이 결과만큼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미군은 상륙 당일에만 24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상륙 후 첫 3주 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는 5만여 명에 이르렀다. 상륙 후 모두 76일간 이어진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합군은 21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 중 3만7000명은 전사했다.

대가 없이 얻어지는 성취란 없다. 비록 지난해 영국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10대의 72%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몰랐고, 안다고 응답한 학생들조차 작전을 이끈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라이언 일병’이라고 대답할 정도이지만 말이다.

이 기록적인 작전은 역사에 새로 이름을 새긴 자와 비극적 종말을 맞은 자의 명운을 갈라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명이던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맡아 작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개선 영웅이 됐고 이후 대통령까지 지낼 수 있었다.

반면 독일의 전쟁 귀재 에르빈 로멜은 이날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본국으로 떠나 자리를 비운 데다 이 작전 직후 연합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중상을 입어 전선에서 탈락했다. 열 달 뒤 아돌프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연인이던 그녀와 결혼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