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책을 편다. 골품제도의 모순과 육두품 세력의 대두, 권문세족의 발호와 농장의 확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족보로 유지되던 계급의 갈등이 사회를 위협하던 흔적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문의 족보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대학 졸업장이다. 취업과 승진의 가장 큰 변수는 대학이다. 심지어는 연애와 결혼까지 대학 졸업장에 따라 다른 시장이 형성되는 신기한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문제다. 서열화된 대학은 다른 사회구조를 종속변수로 거느리며 왜곡해 왔다. 도시(都市)조차 왜곡해 도시공간은 주거 및 환경 조건이 아니라 명문대 입학률로 그 가치가 판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왜곡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계층 설정 구조는 이전 시대의 것들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월한 부분이 있다. 가문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을 묻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이 땅에 이루어 놓은 중요한 성취고 가치다. 우리 사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음서(蔭敍)제도의 틀에서 벗어났다. 골품과 권문세족과 세도정치는 과거형 단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가치에 대한 도전이 수시로 고개를 들고 있다. 기여입학제가 바로 그것이다. 입학의 대가로 돈을 받아 더 좋은 학교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 기여도가 중요하고 기부금은 작은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한다. 정원 외 입학을 허용하면 선의의 피해가 없을 것이라 한다. 미국에서 이미 시행 중인 제도라고도 한다.
해마다 봄이면 재현되는 대학등록금 인상 반대의 집단행동은 분명 문제다. 더 많은 건물을 지어야 대학이 좋아진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립대의 재정문제를 졸업장의 교환가치를 통해 해결한다면 학교는 기업과 다를 바가 없다. 대학에 세금이 면제되는 것은 사회가 그 공공성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기여입학제 실시의 전제는 구성원이 공감하는 사회적 공정성 확보다. 문제는 기여입학의 예외를 만들어도 좋을 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평등한 세상을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목숨을 건 항해 끝에 세운 나라다. 아직도 그 정신이 구석구석에 상당 부분 남아 있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예다. 게다가 ‘미국은 항상 옳더라’는 피란민 시절의 선입견을 이제는 진정 벗어도 좋을 만한 시대도 되었다.
교육은 우리 사회를 움직여 왔다. 단지 다음 세대의 사회구성원을 육성한다는 기능적 의미를 넘어 계층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였다. 쏟아 부은 사교육비의 액수는 다르겠지만 환경미화원의 아들도, 대기업 총수의 딸도 대학입학 고사장에만은 혼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 계층이동의 정당성을 지탱해 왔다. 토지를 근거로 가문을 유지하는 것은 국사가 아닌 세계사의 공통분모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의미는 그 고리를 끊고 개인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구조를 성취하는 데 있다. 이것은 대학 강의실 확보에 선행하는 가치다.
한국 사회는 재산 축적의 과정에 비관과 자조의 질문을 던진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고, 봉급생활자만 봉이 아니냐고 한다. 지난 세기 우리 사회에서 가문의 명예와 사회의 치욕은 종횡무진 엉켜 들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는 여전히 그냥 덮여 있다. 조세정의, 국민개병의 구호와 원칙은 교과서 밖에서는 여전히 공허하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름의 부동산(不動産)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부동산시장은 뛰어들지 않은 자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어 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비웃으며 노름판의 정신으로 성장해 왔다. 부동산 양도소득은 까마득하게 근로소득을 앞지르며 재산 축적의 가장 큰 추진력이 되어 왔다. 졸업장이 문벌족보이고 도시가 노름판인 사회는 기여입학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기여입학제는 서열화된 대학에 화폐가치까지 매기는 일이다.
이것은 국민 정서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견지해야 할 원칙과 가치의 문제다. 공정한 사회는 여전히 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더 공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 기여입학제라는 음서제도는 필요하지 않다.
서현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