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현대 역사학의 고전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세계의 내부 구조와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한번 진지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전 준비 없이 쉽게 접근할 만한 책은 분명 아니다. 이 책을 처음 읽노라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역사 사실과 아리송한 개념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그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저자의 독특한 사관에 따라 교묘하게 배치된 것이다. 이런 점을 잘 모른 채 무작정 이 책을 읽는 것은 약간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세계를 읽어내는 저자의 거대한 틀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지적인 체계를 세워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브로델이 제시한 가장 흥미로운 개념은 제1권에서 소개하는 ‘장기지속’이다. 이것은 다른 역사학자와 브로델을 구분 짓는 가장 독특한 개념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인간의 삶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브로델이 볼 때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대부분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변함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이 전개되는 방식과 한계를 규정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브로델이 이처럼 구조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의 성과를 장기적으로 ‘보존’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브로델이 그리는 세계가 완전한 무변화의 시공간은 아니다. 변화를 모르는 관성의 세계만이 아니라 그 위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경제’와 ‘자본주의’를 함께 이해해야 그의 사관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층의 층위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제2권이고, 다시 여기에 시간의 요소를 집어넣어,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세계경제가 어떻게 구조적 변화를 해 왔는가를 그린 것이 제3권이다.
브로델의 거대한 체계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그려낸 구조는 뼈만 앙상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길어온 여러 이야기들로 흥미진진하게 짜여 있다.
브로델이 이야기하듯 우리의 삶은 여러 층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도 살고 장기적으로도 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세대만이 경험하는 독특한 사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문명의 성과를 그대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측면도 있다. 이것들을 함께 이해하려는 브로델의 구조는 그토록 거대하고 복잡한, 그리고 여러 차원에 걸친 서술들로 짜일 수밖에 없다.
유장한 긴 호흡과 급격하게 변화하는 짧은 호흡이 함께 존재하고, 또 그런 층위들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이런 여러 차원을 염두에 두고 인간과 사회를 거시적으로, 총체성 속에서 이해해 보자는 것이 그의 중요한 메시지이다.
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