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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테마파크 '모텔' vs 사냥터 '여관'

입력 | 2005-06-09 03:05:00


인간의 허위의식을 풍자한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몰래카메라에 정사 장면을 찍힌 커플의 좌충우돌 사랑 얘기를 담은 박진희 연정훈 주연의 ‘연애술사’. 각각 감독의 깊은 자의식이 숨은 작가영화와 젊은층의 취향에 기댄 트렌디드라마랄 수 있는 이들 영화는 결정적인 한 장면에서 극과 극을 드러낸다. 그건 바로 ‘숙박업소 신(scene)’. ‘극장전’이 펼쳐지는 뒷골목 여관과 ‘연애술사’의 주요 무대인 최신 모텔은 ‘남녀상열지사’를 보는 두 영화의 시각차(혹은 세대차)를 여실히 드러내는데….

○ 개방형 vs 폐쇄형

이들 여관과 모텔의 가장 큰 차이는 요와 침대의 위치다. 여관 방바닥에 깔린 요는 한 구석에 있는 반면, 모텔의 침대는 방 한가운데 자리 잡은 것. 두 개의 벽면으로 둘러싸인 요가 폐쇄적 공간이라면, 머리맡을 제외하곤 삼면이 열려 있는 침대는 개방적 공간이다. 두 공간은 남녀가 벌이는 정사(情事)의 성격을 각각 규정해 준다.

‘극장전’ 속 예비감독 동수(김상경)는 쥐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뒤 잡아먹는 고양이의 수법을 쓴다. 여배우 영실(엄지원)을 졸졸 따라다니던 동수는 “실은 제가 심장이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술 한 잔만 사주실래요. …영실 씨가 정말 천사 같아서” 하는 뻔뻔스러운 감언이설로 영실에게 소주를 먹인 뒤 여관으로 데려간다. 동수는 영실을 요까지 ‘몰아넣고’ 남성상위(男性上位)의 체위로 정사를 벌인다. 정사 중 영실이 “죽고 싶어. 죽게 해줘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를 가식적으로 반복하는 것도 폐쇄공간에 갇힌 수동적 여성상을 암시하는 대목. 정사를 ‘소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냥(hunting)’으로 보는 홍 감독의 시각이 드러난다.

반면 ‘연애술사’ 속 플레이보이 마술사 지훈(연정훈)은 치과의사 현주(오윤아)를 궁상맞게 ‘몰아가지’ 않는다. 대신 간단한 눈맞춤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간단한 대화로 ‘합의’한 뒤 곧바로 모텔을 찾는다. “우리 진도 너무 빨리 나가는 거 아냐?”(현주) “빨리 나가야 복습도 하고 예습도 하지.”(지훈) 두 사람의 정사 체위는 여성상위(女性上位)로,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여성상을 내비친다.

○ 일체형 vs 분리형

두 영화 속 남녀관계의 간극은 여관과 모텔의 내부구조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우선 ‘극장전’ 속 여관은 방과 욕실이 두터운 문을 사이에 두고 격리된 ‘분리형’. 자살을 결행하기 전 몸을 씻으려 욕실로 들어간 상원(이기우)은 방에 앉아 있는 영실이 ‘수면제를 먼저 다 먹어버리지 않을까’ 의심한다. 남녀간 소통이 단절된 상태임을 드러내는 대목.

반면 ‘연애술사’ 속 모텔은 방과 욕실이 대형 투명유리를 사이에 두고 사실상 연결돼 있는 ‘일체형’. 몰래카메라를 색출하기 위해 옛 남자친구인 지훈과 함께 모텔을 찾은 여교사 희원(박진희)은 욕실에 있다가 대뜸 지훈(침대 위에 앉아 있는)에게 생리대를 사와 달라고 부탁한다. 욕실과 방이 연결된 내부구조가 여자로선 쑥스러운 부탁도 거리낌 없이 던질 수 있는 의사소통 구조를 만드는 것.

자는 곳과 씻는 곳이 분리돼 있고 벽에 콘돔 자판기와 선풍기만 덩그러니 설치된 여관은 번식과 휴식, 인간적 고뇌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연극무대처럼 외로운 공간. 반면 인터넷이 연결되는 컴퓨터와 140여 개 채널의 위성방송이 나오는 42인치 텔레비전, 공기방울 기능 욕조, 전동침대, 세정기, 연수기, 각종 음료와 면봉 등 편의용품이 담긴 복합자동판매기(컨비니언스 박스)를 하나의 공간 안에 갖춘 모텔은 번식과 휴식, 고뇌마저도 한데 통합해 엔터테인먼트화해 버리는 일종의 ‘테마파크’인 셈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