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마을 담벼락에는 언제나 낙서가 쓰여 있곤 했다. 누구는 어떻게 알나리깔나리, 누구는 누구를 뭐뭐 했대요. 그곳에는 금기시된 욕설과 성적인 용어들이 가득 채워져 있곤 했다. 어둠 속에서 낙서를 한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제 우리는 호사가의 가십이 될 얘기가 전국적인 뉴스, 세계적인 뉴스가 되는 시절을 살고 있다. 하나의 사실(팩트)이 온라인상에 올라서면 빛의 속도로 전파된다. 팩트에 수만 가지의 감정이 뒤엉켜 가십은 확대 재생산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무의식적 자아로 규정한 이드(id)는 결국 한 세기를 지나와 사이버 공간에서 아이디(ID)로 재탄생한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개인은 갖가지 아이디로, 무수한 익명의 개체로 유목민처럼 떠돈다. 링크를 하면 다른 세계로 금방 ‘경계 이동’을 한다. 어느 사이트로 들어가든 그들의 흔적을 남겨 놓을 수 있다. 동물들은 자신의 분비물을 남겨 놓음으로써 자신의 영역임을 증명한다. 사이버 유목민들은 어느 곳에서든 거친 배출과 존재 노출을 서슴없이 감행한다. 어느새 좁은 뒷골목은 광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네티즌을 흔히 누리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이 배회한다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누리꾼의 적극적 활동이 한국 사회의 문화적 다원성과 민주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이버족은 더 많은 조회수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인터넷상에서 헤드라인은 좀 더 센세이셔널한 표현을 찾고 있다. 낙서와 메모를 위한 게시판은 더 자극적인 제목을 원한다.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여 소수의 의견과 일상의 풍경을 공적인 광장으로 끌고 나오는 데는 과도한 자기노출증이 내포되어 있다. 한 간호조무사가 신생아를 놀림감으로 만들어 자신의 누리사랑방(블로그)에 사진으로 올린 것은 오직 자신의 누리사랑방에 대한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불쌍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신생아를 학대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누리꾼들은 카메라폰으로 자신의 얼굴을 찍어 올리는가 하면 가장 비밀스러운 개인적 관심사와 일기를 공개한다. 연인의 사진을 수첩 모서리에 간직해 가끔씩 꺼내 보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제 일기는 누군가에게 더 읽히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얼마 전 매너 없는 지하철 개주인 사건, 일명 ‘개똥녀’라는 이름을 달고 누리꾼들의 격분을 불러온 사건이 있었다. 한 20대 여성이 애완견을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 애완견은 설사를 했고 그녀는 당황한 끝에 배설물도 치우지 않은 채 지하철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욕을 했고 지하철에 탄 할아버지가 그 배설물을 치웠다.
문제는 사건 발생 며칠 후 당사자의 얼굴 사진이 공개됐다는 것이다. 사건의 본질이 인권침해로 급변했고 파장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인터넷상에서 가십의 확산에 따른 인권침해는 대학 도서관에서의 학우 폭행사건, 변심 애인 공개 비난사건 등 그전부터 있어 왔다. 물론 사건의 장본인에게도 이러저러한 잘못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대역죄인처럼 비난받는다면 오히려 책임 없는 집단적 구타가 되어버린다. 이처럼 무분별한 신상 공개는 결국 인민재판식 멍석말이가 될 수 있다는 점, 감정적 응징에 의한 인권침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리꾼들은 말 그대로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또 다른 가십을 찾아 떠난다. 후속의 가십을 이끌어내면서 화제의 양을 늘리고 끝없이 이동의 벡터를 가동한다. 유목민처럼 이곳저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면서.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사람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수한 카메라의 권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언제든 무수한 익명의 제공자에 의해 신상 공개, 공개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난과 자제 촉구의 목소리가 동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누리꾼들의 자기 절제와 자체 정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가십의 동력과 속도가 복수와 응징의 집단적 사회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감시와 검열의 카메라가 문화의 거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책임한 댓글이 가져오는 명예훼손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