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6·15 통일대축전’ 남측 정부 대표단이 어제 평양에 들어갔다. 정 장관이 노무현 대통령의 친서(親書)를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있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성사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2, 3일 후에 ‘좋은 일’이 생기면 곧바로 공식 발표할 것”이라는 정부 측 설명으로 보아 정 장관의 ‘평양행(行) 보따리’ 속에 무언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번 행사는 한미 정상회담 직후에 열린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난 주말 양국 정상은 한미동맹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북한 핵문제의 외교적 해결 원칙에 재차 합의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북한이 핵 포기에 나서면 북한과 ‘보다 정상적인 관계(more normal relations)’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 정권 출범 이후 세 차례 열렸던 정상회담 결과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이번에는 함의(含意)가 각별해 보인다. 지금까지 ‘북핵 게임’의 기본 구도는 미국의 인내심이 고갈돼 가는 가운데 북한은 위기를 계속 고조시키고, 그 사이에서 한국은 미국의 과잉 대응을 만류하는 형국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담은 부시 대통령이 북한뿐 아니라 한국에도 한 번 더 북한을 설득할 ‘기회’를 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 장관의 ‘평양행 보따리’ 속엔 북한을 6자회담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북한판(版) 마셜 플랜’과 같은 유인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좀 더 대담한 ‘거래’를 구상했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한이 어떻게 나오느냐다. 국제 사회의 압력이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선 ‘민족 공조’라는 명분이 어느 때보다 긴요할 것이다. 남북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연출해야 미국의 예봉을 무디게 하고 시간도 벌 수 있다. 마침 남측은 민간 행사인 평양축전에 유력한 차기 대권 예비후보를 보낼 정도로 적극적이다. 이 예비후보가 유인책으로 뭔가를 들고 오기까지 했다면 북한으로선 그 이상의 ‘꽃놀이 패’가 없을 것이다.
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북한에 ‘선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반드시 조건이 붙어야 한다.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약속과 이를 입증해 보일 구체적인 ‘행동’이 그것이다. 어정쩡한 합의는 북한으로 하여금 다시 시간을 끌 빌미만 줄 뿐이다. 이런 결과는 미국도 더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국판(版) 북핵 ‘레드 라인(red line)’을 준비해야 할 때가 아닐까. 북한이 핵 개발을 멈추지 않을 경우 독자적으로 취할 행동 계획을 마련해 두자는 것이다. 예컨대 북한이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면 모든 남북 경협을 중단하고, 핵 실험을 강행하면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동참하는 등 단계별 대응책을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핵 불용(不容), 평화적 해결, 한국의 주도적 역할 등 북핵 문제 해결의 3원칙을 강조해 왔다. 그러는 사이 북핵 문제는 악화되기만 했다. 이젠 우리도 ‘핵무기는 절대 안 된다’라는 의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당장 6·15 행사와 21일 남북 장관급회담에서부터 그 같은 단호함을 보여 줘야 한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