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손청동 씨의 서재에는 전공서적보다 많은 900여 장의 DVD가 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영화가 아니라 대부분 오페라, 콘서트 등의 클래식 음악 영상물이다.
“예전 같으면 정상급 해외 단체가 내한해야 감상할 수 있었던 공연을 거실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습니다. 4년 전부터 음반점에서 눈에 띄는 대로 수집하고 ‘아마존 닷컴’ 등 해외 우편주문 사이트에도 주문했죠.”
손 씨는 이렇게 모은 영상물 정보를 오페라 동호인 모임 ‘광장클럽’과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클래식 오페라 정보 사이트 ‘페라하’ 등에서 나누고 있다. “나보다 훨씬 열성적인 팬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손 씨는 말한다.
○ 유럽공연물 1년 안에 국내 출시
국내 상륙 9년째인 DVD가 공연 감상문화를 바꾸고 있다. 정작 DVD시대를 열어젖힌 영화 DVD가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의 성행 등으로 고전하는 반면, 공연물 DVD는 뒤늦은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1∼5월 국내 출시된 클래식 음악 및 발레 DVD는 70편. 그러나 올해 같은 기간에는 이 두 배 가까운 136편이 출시됐다(인터넷 교보문고 자료).
DVD 수입사인 아울로스 뮤직의 이종선 기획팀장은 “아마존닷컴 등을 통한 해외 우편주문이 네티즌 사이에 확산돼 있어, 이보다 빨리 국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새 DVD가 발매되는 즉시 수입 주문을 띄우고 있다”고 밝혔다. 발레·오페라 칼럼니스트 유형종 씨는 “최근에는 유럽의 화제 공연물이 무대에 올려진 지 수개월∼1년 안에 DVD로 국내에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DVD의 인기에 힘입어 동호인 모임도 잇달아 결성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 DVD 동호인 모임 공간인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무지크바움(www.musikbaum.com)과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신포니아(www.sinfonia.co.kr)를 중심으로 ‘발레바움’ ‘마리아칼라스’ ‘말러리아’ ‘필하모니아 클럽’ 등 수십 개의 동호회가 DVD시사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 바그너 악극을 전문적으로 감상하는 ‘바그네리안’ 등 작곡가 동호회와 ‘국립발레단 동호회’ 등 공연단체 팬클럽도 DVD 감상을 중심으로 특색 있는 동호인 모임을 꾸려나가고 있다.
유 씨는 “공연 DVD의 양적인 확산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는 DVD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공연 관객들의 눈높이가 급속히 상향조정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공연단체들은 DVD 보급으로 달라진 관객의 눈높이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열성적이다.
고희경 예술의 전당 공연기획팀장은 “오페라 관객들이 예전에는 공연이 끝나면 가수들의 가창력에 대해 주로 반응을 보였지만, 최근에는 ‘연출의 감각이 낡았다’ ‘조명이 감탄스럽다’는 등의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고 팀장은 “기획단계에서 제작진이 최신 공연물을 DVD로 감상하며 최근의 공연 조류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제작과정 부록 등 팬서비스도
국립오페라단은 회원 관리 차원에서 지난해 5월부터 DVD로 오페라를 감상하는 ‘클럽 오페라’를 운영하고 있다. 바리톤 김동식, 베이스 함석헌 씨 등이 해설자로 출연했다. 정은숙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은 “주역 가수들이 해설을 맡아 회원들의 반응도 좋고, 성악가들도 오페라 공연의 종합적인 측면을 공부할 수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경우 지난해 10월 발레 ‘심청’을 DVD로 발매한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돈키호테’를 발매했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은 “제작 과정 등을 담은 부록을 싣는 등 해외 영상물에 뒤지지 않도록 신경 쓴 결과 ‘심청’이 2000여 장이나 판매됐다”고 밝혔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