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7일 낮 평양 대동강 영빈관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찬을 하며 환담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정 장관에게 “상대방(미국)이 우리를 인정,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7월 중에라도 6자회담에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통일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17일 “미국이 우리를 인정,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다음 달 중 6자회담에 복귀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핵 문제가 해결되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겠으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해 철저하게 검증을 받겠다”는 뜻도 표명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평양 대동강 영빈관에서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정 장관이 밝혔다.
이에 따라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고조됐던 한반도의 긴장이 6자회담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돌파구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핵을 포기할 의사를 밝히면서도 몇 가지 전제 조건을 붙인 것에 비춰 볼 때 외교적 해결이 단기간에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 장관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6자회담과 관련해 “이 문제는 미국과 좀 더 협의를 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또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유훈으로 (1991년 12월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유효하다”면서 “안전보장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관철된다면 핵을 하나도 보유할 이유가 없다. 미국이 우리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자위적 차원에서 맞서 보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언급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버리고, 북한 체제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야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에 대해선 “적절한 때에 이뤄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정 장관 등과의 오찬에선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은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남북한이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하며,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면 대규모의 포괄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는 노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와 우리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중대 제안’도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과 정 장관은 이 밖에 △남북간 장성급 군사회담 재개를 통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의 군사적 긴장 해소 △서해에서의 남북 공동어로 실시를 위한 수산회담 개최 △8월 15일 금강산에서 제1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개최 및 대규모 화상(畵像) 상봉 추진 △서울 8·15 통일대축전 행사에 비중 있는 당국 대표단 파견 △서울∼평양 육상(陸上) 직항로 개설 등에도 합의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9시 청와대에서 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김 위원장이 긴 시간 동안 성의 있게 대화한 것은 의미가 크고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다”며 “사소한 말실수 없이 후속조치를 빈틈없이 취해서 좋은 결실로 이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美고위관리 “北의 修辭일뿐”▼
숀 매코맥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17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자회담에 복귀할 용의가 있다’는 발언에 대해 “북한이 무조건 회담에 복귀해 건설적으로 회담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는 김 위원장이 “우리를 인정,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이라고 단서를 붙인 것에 대한 거부감의 표시로 보인다.
이에 앞서 익명의 미 고위 관리는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수사(修辭)에 불과한 언급으로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권순택 특파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