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들어진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한 장면. 유럽의 가상 미니국가인 그랜드 펜윅의 중세 스타일 군사들이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레너드 위벌리 지음·박중서 옮김/280쪽·9000원·뜨인 돌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의 상징인 여신상이 신성한 얼굴로 횃불을 쳐들고 있는데 발밑에 생쥐 한 마리가 나타나자 헐레벌떡 도망치고 만다. 미국 소설인 이 작품이 1959년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나온 첫 장면이다. 소설의 원제가 ‘생쥐의 포효(The mouse that roared)’라는 걸 슬쩍 암시한 것 같다.
원제가 이랬던 데는 이 소설이 ‘그랜드 펜윅’이라는 ‘손바닥만 한’ 약소국이 미국을 침공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경제난에 시달리는 이 나라가 300만 km²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쿼디움 폭탄을 손에 쥐고 어깨에 힘을 주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북핵(北核) 이야기 아냐?”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이나 그랜드 펜윅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이 소설은 희극적인 반전 풍자 소설의 백미(白眉)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가로 8km, 세로 5km 넓이의 그랜드 펜윅은 500년간 대공(大公)이나 대공녀(大公女)가 다스려 온 유럽의 가상 소국이다. 지은이는 이 나라가 우표를 만들어 나라 살림에 보탠다는 점에서 리히텐슈타인과 비슷하다고 슬쩍 흘린다.
이 나라는 포도주로 살림을 꾸리기도 하는데 포도 작황이 너무 부진하자 포도주에 물을 타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견해차로 ‘희석당’과 ‘반(反)희석당’으로 갈라져 으르렁거린다. 스무 살이 갓 넘은 대공녀 글로리아나 12세는 ‘아저씨’라 부르기도 하는 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다가 마침내 국제 역학을 이용해 나라 살림을 살리기로 한다.
“우리나라에 공산당이 그럴 듯하게 만들어지게 해서 미 연방의회에 알리는 거예요. 그럼 미국이 공산주의 위협에서 구해내려고 돈을 빌려주지 않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에요. 미국은 (독일처럼) 패전국한테 구호물자도 보내주고, 잘 복구시켜 주잖아요. 월요일에 미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화요일에 점령당하면, 금요일에는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 이상으로 복구가 될 거예요.”
그랜드 펜윅은 미 국무부에 ‘미국민 여러분께 인사드리며’로 시작하는 간지러운 선전포고문을 보낸다. 그리고는 중세 유럽풍의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20명가량의 군인들을 배에 실어 실제 뉴욕을 침공하면서 파란이 시작된다.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여럿 나와 킥킥 웃게 만든다. 하지만 지은이 위벌리는 그때마다 그럴듯한 역사적 사실과 자료들을 내놓아서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짧게 한마디 쿡 찌르는 대목들도 나온다. “공산주의자란 자기보다 남들이 뭔가를 더 많이 얻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은 대목이다.
위벌리는 이 작품이 성공하자 ‘그랜드 펜윅’ 시리즈를 썼다. 500년 전 이 나라가 세워질 때의 이야기, 냉전시대 우주 개발 경쟁을 풍자한 이야기, 석유 위기를 풍자한 이야기 등이다. 그때마다 제목에는 그랜드 펜윅을 ‘생쥐(Mouse)’라고 비유해 놓았다.
번역자인 박중서 씨는 미국 리틀 브라운 출판사가 1955년 펴낸 이 소설을 꼭 읽고 싶었는데 “얼마 전 서울 신촌의 한 헌책방에서 눈에 들어오더라”고 썼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던 생쥐 한 마리가 반세기 만에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