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선…▼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이덕일 지음/295쪽·1만 원·마리서사
《김영삼 정부 이후 10여 년간 개혁은 한국사회의 시대적 화두였다. 그러나 한쪽에선 ‘개혁피로증’을 말하고 다른 한쪽에선 ‘개혁무용론’이 토로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역사저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우리 역사 속 개혁가들을 불러내는 방식으로 그 해답을 찾는다. 삼국시대 김춘추부터 조선 사림개혁의 상징 조광조, 개화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까지 개혁가들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한다. 책에 등장하는 개혁가 중 몇몇의 입을 빌려 오늘날 개혁의 문제점을 들어 보자.》
▽김춘추=마, 내사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은 것은 시대적 어젠다를 제시했기 때문인기라. 642년 내 사위와 딸년이 백제군의 공격 때 죽었다 아이가. 그때 내사 개인적 복수를 넘어선 백제를 통합하겠다는 국가적 비전을 내세운기라. 그런데 주위에선 권력쟁탈 때문에 지그들끼리 치고받는 놈들뿐인기라. 그래서 내가 찾아간 게 낼 억지 결혼시킨 처남 김유신인기다. 사실 가야계로 ‘왕따’ 신세였던 처남은 내가 그런 속물들하고 다른 줄 알고 여동생을 줬는데 내가 오리발을 내미니까 불까지 싸지르며 엄청 화를 냈다 아이가. 그래 내가 그 여동생을 아내로 맞긴 했어도 몇 년간 서먹서먹하게 지냈제. 그래도 내가 찾아가 ‘타도 백제!’하니까 ‘우리 친구 아이가’하며 얼싸안아 준기라. 내가 고구려에 동맹 맺으러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이번엔 ‘삼국통일’을 화두로 내세우니까 처남만 이를 알아줬다 아이가. 그래 처남의 가야계를 동원해서 갸들을 다 쓸어버리고 내가 왕이 된기다. 백제 의자왕이나 고구려 연개소문도 권력을 꽉 잡았지만 내사 권력 장악은 수단이고 더 큰 목표가 따로 있었기에 제일 약체였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한기다. 그런데 요즘 개혁의 시대적 어젠다는 도대체 뭐꼬?
▽태종=과인은 아들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악역을 떠맡았다. 과인은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철저한 배신자였다. 52명의 개국공신과 희생물의 피까지 나눠 마시며 영원한 동지를 맹세했지만 6년 만에 그들 대부분을 내 손으로 죽였다. 2년 후에는 동복형제들까지 죽이고 보위에 올랐지만 이번엔 외척을 물리치기 위해 과인을 도왔던 처남 4형제를 모두 죽였다. 남들은 내가 권력의 화신이 돼 그런다고 욕했지만 내 목표는 권력 그 자체가 아니었다. 아들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를 위해 아들의 장인까지 죽였고, 맏아들을 내쫓고, 사랑하던 애첩까지 쫓아냈다. 요즘 한국의 대통령들은 공신은 물론이고 자기 가족까지 베어낼 용기가 있는가?
▽정조=요즘 권력 주변 사람들이 대통령과 과인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과인이 당시 사회 기득권 세력이었던 노론을 축출하려 했고,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지어 수도를 옮기려 했고, 규장각을 통해 아웃사이더 지식인들을 개혁의 주도세력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라나. 하지만 이는 모르고 하는 소리다. 과인은 과거지향이 아니라 미래지향의 지도자였다. 노론을 견제하긴 했지만 결코 적대세력으로 돌리지 않고 포용했다. 또 화성을 지은 것은 서울 중심의 노론을 약화시키겠다는 정치공학적 목적 때문만이 아니었다. 화성을 상업혁명과 농업혁명의 모델도시로 만들어 전국에 확산시키려는 생활개혁의 일부였다. 또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키운 것은 당파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신분을 떠나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의 실천이었다. 현재의 개혁이 과연 과인의 치세만큼 통합적이고 미래지향적인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중국사에선…▼
◇혁신/화원위엔 지음·이은주 옮김/428쪽·2만3000원·한스미디어
머릿속에 늘 기막힌 계책이 영글어 있었던 방통. ‘와룡(제갈량)과 봉추(방통) 둘 중 한 사람만 얻어도 능히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천하대세를 환히 들여다보았다. 임기응변에 능했던 그의 책략은 절묘했고 술수는 날렵했다.
“무력으로 빼앗되 법도로 다스리자”며 유비를 설득해 익주를 손에 넣고자 했던 방통의 생각은 옳았다. 그가 있었기에 유비는 천하삼분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방통이 그렇게 빨리 죽지만 않았더라도 유비와 촉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지.
그러나 방통은 지나치게 변화를 중시한 반면 인의(仁義)를 경시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변화에도 한계가 있어야 정도(正道)로 돌아갈 수 있는 법!
이 책은 변화와 혁신의 키워드로 풀어쓴 인물열전이다. 중국 역사에 명멸(明滅)했던 절세 영웅들의 치국의 경륜과 처세 철학을 담았다.
하 은 주 삼대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 양한 시대에서 명청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관통했던 변법(變法)운동을 통해 저자는 묻는다. 변화하지 않고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不變者不得天下)?
열강의 침략으로 국가의 운명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청나라 말기, ‘변화로 변화에 맞섰던’ 증국번. 가히 변화와 혁신의 귀재라할 만하다.
그는 도가의 성인인 ‘내성(內聖)’에서 세상을 도(道)의 길로 인도하는 ‘외왕(外王)’으로, 그리고 심신을 닦는 ‘수신(修身)’에서 천하를 평정하는 ‘평천하(平天下)’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어찌 덕(德)과 인의만으로 대업을 성취하랴. 고래로 역사는 자애로운 군주보다 독재자에 관대했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던 주원장. 그에겐 영원한 벗은 없었다. 영원한 이득이 있을 뿐이었다. 사무치는 원한을 가진 자라도 너그러이 용서했으나 동고동락한 측근이라 하더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서슴없이 목을 벴다.
포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군세(軍勢)에 따라 처우를 달리 했으니 초기엔 포로들의 상처를 치료해준 뒤 되돌려 보내주었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후환을 없앨 땐 인정(人情)을 잠시 잊는다’던 자희태후나, ‘남을 해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며 남을 의심하는 마음은 더욱 심하였다’던 위안스카이의 몸에도 주원장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제 ‘變經’(2003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