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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人3色]개인이 아닌 네트워크가 세상의 법칙을 결정한다

입력 | 2005-06-18 07:56:00


우리는 대개 역사를 몇 명의 유명한 사람들―영웅이거나 악인―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황산벌 전투는 계백과 화랑 관창의 이름으로 후세에 남았고,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의 대명사로 꼽힌다. 황산벌에서 죽어간 이름 모를 병사들과 유대인을 손가락질했던 매정한 손들 역시 그들과 똑같이 싸웠고, 똑같이 잔인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이름은 뒤에 남고, 누군가는 잊혀지는 것은 대체 무슨 차이인가?

우리는 그간 이런 역사적 격변의 와중에는 반드시 영웅이 존재했고, 그 영웅의 행로가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기계전사 ‘터미네이터’는 장차 인간계의 지도자가 되어 로봇들을 위협할 아이(와 그 엄마)를 죽이려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찾아간다. 그렇다면 영웅이 없어진다면 역사적 터닝 포인트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가. 콜럼버스가 아니었다면 미국은 발견되지 않았을까? 아니, 그럴 것 같진 않다. 당시의 모험가들은 황금과 후추가 자라는 별천지를 꿈꾸며 너 나 할 것 없이 서쪽으로 뻗어나가던 상황이었으니 비단 콜럼버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시기에 미국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어도 좋다.

역사적 격변의 이유는 사회적·시대적 상황이 혁명을 겪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심하게 뒤틀려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유리컵에 물을 가득 담고 스포이드로 물을 한 방울씩 더해보자. 조심스럽게 더해 준다면 물은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라 표면장력에 의해 동그랗게 뭉쳐지며 컵 위로 살포시 솟아오를 것이다. 여기에다가 계속해서 물을 더해 주면 어느 순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순간에 떨어진 단 한 방울로 인해서 컵 위로 솟아오른 물들은 순식간에 서로간의 결합을 잃고 넘쳐흐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한 방울로 인해 컵 위로 솟아올랐던 물 전체는 무너지고 수위는 컵 높이와 같아지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영웅이라고 불렀던 역사 속의 인물들은 컵 위로 물이 넘치게 한 ‘마지막 한 방울’일지도 모른다. 영웅이 난세를 평정하는 것이 아니라,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의 논문이 두 번이나 게재돼 일반인들에게도 이름이 귀에 익게 된 과학저널 ‘사이언스’의 편집장이었던 뷰캐넌 씨는 인간의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는 저서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지호·2004년 발간)에서 ‘네트워크 과학’의 주요 개념들을 설명하면서 역사의 흐름 역시 관계들의 밀도 있는 짜임새 속에서 이루어지는 확률적 사건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렇게 개인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주목한다면, 사회를 움직이는 격변의 가능성은 편재(偏在·한곳에 치우쳐 있음)해 있는 것이 아니라, 편재(遍在·두루 퍼져 있음)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상은 표현형의 복잡성과는 달리 단순한 법칙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것은 법칙이 아니라, 각 개체의 연결고리의 다양성이니까 말이다.

네트워크의 복잡성을 기억한다면 더위에 조금 늘어진 전깃줄이 더위에 웃자란 나뭇가지에 걸리는 것만으로도 미국 전체가 암흑에 빠질 수 있는(‘Small World’·세종연구원·2004년 발간) 현실을 이해할 수도 있고, 주말이면 늘 일어나는 교통체증과 공룡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동시성의 과학, 싱크· SYNC’·김영사·2005년 발간) 역시도 수긍이 가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든 자연법칙이든 중요한 건 역시 상호관계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