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의 요정'에서 여학생, 할머니 등 1인 30역을 소화해 낸 김성녀 씨. 사진 제공 PMC
‘벽 속의 요정’ 첫 날 첫공연을 본 뒤 김성녀 선배에게 ‘산삼 엑기스’를 보냈다. 40일간 이 무대를 지키다보면 무엇보다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공연 중에는 절대 아프지 않는 ‘인종’이 배우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사람들은 모노드라마(1인극)는 지루할 것이라 지레짐작하지만, 오직 한 명에게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에 작품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것이 모노드라마만의 매력이다. 연극이 흘러갈수록 여러 명의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는 것은 모노드라마를 접해 본 관객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 때문에 모노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의 역량이다. 김성녀 선배는 처음 하는 모노드라마인데도 훌륭하게 그녀만의 무대를 일궈냈다. 지난 수년간 수천 회의 모노드라마를 해온 나조차도 어려운 남자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잘 소화하며,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타고난 미성으로 중간 중간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객석에선 박수가 터졌다. 그 연배에 그렇게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감탄스러웠다. 여유 있게 극을 밀었다 당겼다 하며 마음껏 판을 펼치는 김성녀. 그런 힘은 배우라고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보여지는 것도 아니다. 30년 연기 경력과 몇 십만 명의 관객을 휘어잡은 마당놀이에서 쌓은 오랜 노하우가 괜한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녀는 마당놀이뿐 아니라 정극무대에서도 사랑스러운 여배우로 우뚝 섰다.
모노드라마 전문 연기자로서 김성녀의 '벽속의 요정'을 지켜본 김지숙 씨.
좌우로 이념이 대립되던 시절을 다루었기에 자칫 무거울 수 있었던 이 연극은, 깔끔한 연출과 배우 김성녀의 물 오른 연기 덕에 감동적인 가족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1인 다역의 모노드라마를 하다보면 배우는 종종 공포스러운 순간과 마주친다. 한 인물의 감정에 너무 몰입해 다른 인물로 넘어갈 수 없는 순간이다. 어쩌면 영점 몇 초에 불과한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배우에게는 한없이 길게 느껴지고 두려운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는 대사를 해도 내가 대사를 하는 것 같지 않고, 마치 대사의 장면이 눈앞에서 저절로 펼쳐지는 것 같다. 그녀 역시 공연을 하면서 스스로 감정을 한두 번 추스르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가 짠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과 벽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랬다. 관객들은 아비의 사랑에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그 감정의 미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많은 배우들이 모노드라마를 끝낸 뒤 슬럼프에 빠진다. 모든 걸 다 보여주었기 때문에 다음엔 또 뭘 보여줘야 하나, 라는 혼란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만은 그런 혼란에서 비켜나 있을 것이다. 다 보여줘도 늘 더 보여줄 것이 남은 여배우, 그러기 위해 늘 자신을 담금질하는 그녀이기에….
7월 24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우림 청담 씨어터. 02-569-06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