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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뷰]씬시티…왜 폭력과 詩냐고? 현실 초라하니까

입력 | 2005-06-23 03:02:00

사진제공 영화인



‘씬시티(Sin City)’는 현대 중년 남성의 백일몽을 실현한 영화다.

동명의 원작 만화에 붙은 ‘그래픽 소설(graphic novel)’이라는 장르명은 ‘소설처럼 두꺼운 만화책’이라는 뜻이다. 잡지에 연재되던 얄팍한 분량의 만화를 뛰어 넘어 두꺼운 소설처럼 받아들여지고픈 욕망과 의지의 표현이다. 만화가 어린이의 영역이라면 소설은 어른의 영토다. 그래서 그래픽 소설은 어른의 만화다.

○ 만화 ‘씬시티’의 컷 그대로 옮겨

‘씬시티’의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스는 1980년대 ‘그래픽 소설’계의 기린아 프랭크 밀러의 원작을 영화로 옮기면서 만화를 구성하는 각 컷을 거의 조금의 오차도 없이 스크린에 옮겼다. 배우들의 연기는 대부분 블루스크린 앞에서 이뤄졌고 배경은 나중에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 넣었다. ‘씬시티’는 1초에 24프레임의 필름이 돌아가는 영화가 아니라 만화 한 컷, 한 컷이 그대로 스크린에 투사되는 ‘빛과 그림자의 만화’인 것이다.

미국의 범죄 도시 ‘씬시티’. 로크 가문의 형제가 주교와 상원의원으로 이 도시를 지배한다. 경찰도 은퇴를 앞둔 형사 하티간(브루스 윌리스)을 빼고는 모두 부패했다. 도시의 한 구역은 창녀들이 질서를 관장하고 드와이트(클라이브 오언)라는 남성만이 그들과 어울린다. 야수를 연상시키는 이 도시 ‘최강의 사나이’ 마브(미키 루크)는 그에게 사랑을 준 단 한 명의 여성 ‘골디’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진짜 살인범을 쫓아 도시를 휘젓는다.

다시, ‘씬시티’는 가족을 부양하고, 회사에서는 아래위로 눌리고 치받히며, 와이셔츠에 묻은 립스틱에 안절부절못하는 중년 남성이 머릿속에 그리는 공상이자, 어두운 백일몽이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의 초자연적인 힘과 그들이 누리는 엄청난 부는, 현실을 알아버린 중년 남성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대신 뼈가 부서지고 피를 튀기는 과장된 폭력, 사회의 기성질서와는 무관한 자신만의 개똥철학, 일상에서는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었던 시(詩), 그리고 한 여성을 위한 절절한 사랑을 꿈꾼다. 물론 이것이 꿈임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깨어나기 전까지는 짜릿하다. 아득하고 아찔하다.

‘씬시티’의 폭력은 폭력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킬러의 팔꿈치 아래와 무릎 아래를 잘라 들개의 밥이 되게 한다. 악당의 인공 성기를 뽑아버리고, 주먹으로 두개골을 난타해 부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2002)처럼 극장을 뛰쳐나갈 만큼 잔혹하게 다가오지는 않다. 이 모든 것이 만화임을 알기 때문이다.

○ 무기력한 중년의 머릿속에 그려진 우울

코트 깃을 세우고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는 영화 속 사내들은 음유시인이다. 가장 험악한 인상의 마브조차 ‘창녀의 죽음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신부의 물음에 ‘(내가) 죽을 만한 가치/(악당을) 죽일 만한 가치’라고 읊조린다. 드와이트는 늪에 빠져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들이 삼켜라/폐가 가득 채워지도록/너를 의지하는 폐가 터지도록’이라고 폼을 잡는다.

왜 시와 폭력을 숭배 하냐고? 현실에서 펴지 못한 중년의 개똥철학을 위해서라고 하면 답이 될까. ‘누구도 담배를 완전하게 끊는 게 아냐. 힘들고 불안한 상황에서 피워야 그게 진정한 흡연가야.’ ‘친구들에게 네가 쓸모 있음을 보여줘야 돼. 때론 그게 죽음을 뜻하더라도!’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현실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위한. 열아홉 살 소녀 낸시(제시카 알바)를 구해낸 하티간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말한다. “노병이 사라져야 그녀가 산다.”

‘씬시티’는 이것이 만화임을 소리로도 입증한다. 마브, 드와이트, 하티간 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레이션은 눈감고 들으면 누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낮게 깔리는 무거운 음성에 억양은 단조롭다. 혼자서 만화 속 인물을 상상하며 소리 내어 대사를 따라 읽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30일 개봉. 18세 이상.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