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배우 한번 만나려고 3개월을 기다린다. 프로듀서는 ‘제발 배우에게 책(시나리오)을 전해 달라’며 로드매니저에게 돈을 찔러줘야 할 때도 있다. 개런티로도 모자라 제작사 지분의 50%를 떼어주지 않으면 출연하지 않겠다는 배우도 있다.”
23일 밤 기자들과 만난 강우석(시네마서비스 대주주) 감독 겸 제작자는 최근 배우들의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매니지먼트사들이 소속 배우들의 출연을 담보로 제작사 지분까지 요구해 제작비가 갈수록 치솟는 현실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오늘 내가 ‘깽판’ 좀 놓겠다. ‘공공의 적’이 되겠다”고 말을 꺼낸 뒤 “배우들이 돈을 너무 밝힌다. 영화계 전부 모여서 배우들 밥 먹여주고 있는 꼴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강 감독은 “‘선생 김봉두’ 제작 때도 제작사 지분의 30%를 요구하는 배우에게 ‘너 집에 가’ 하고 바로 차승원으로 교체했다”면서 제작사 지분을 요구하는 배우들로 국내 간판급 배우의 실명을 거론했다.
강 감독이 분통을 터뜨린 이튿날인 24일 오후 영화제작가협회 소속 제작사 대표 31명이 모였다. 이들은 “배우 및 매니지먼트사의 공동제작과 지분 요구, 그리고 끼워 팔기(스타를 기용하려면 소속사 다른 배우들을 조연으로 써달라고 요구하는 것) 요구를 앞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제작자들의 이런 움직임의 근저에는 국내 최대 연예매니지먼트 회사인 싸이더스HQ가 최근 자회사인 아이필름을 만들어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등 매니지먼트사의 잇따른 제작 참여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기자가 만난 국내 굴지의 매니지먼트사 대표는 “설탕(매니지먼트) 만들던 기업이 사탕(제작)까지 만들어 보겠다는데 뭐가 잘못된 거냐”고 반발했다. 그는 “배우가 제작사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지분보다는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전제한 뒤 “매니지먼트사가 캐스팅 단계에서 지분을 불쑥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기획 및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일정한 역할을 했다면 공동제작 크레디트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들이 돈만 보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돈을 좀 적게 받더라도 시나리오가 좋고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킬 영화란 확신이 들면 어떤 배우가 외면하겠나”라며 “제작자들이 시나리오를 들고 와서 배우에게 ‘지분을 줄 테니 출연해 달라’고 먼저 지분 배분을 제안하는 경우도 많다”고 주장했다. 영화판의 ‘물’이 흐려진 데는 먼저 지분 배분을 제안하는 등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은 제작사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것.
그는 “기존 영화 제작자들이 매니지먼트사들의 제작 참여를 제도적으로 금지할 방법이 없으니까 출연료 상승이나 배우들의 지분 요구를 이슈화해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이라며 “그분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다시 배워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제작자들의 이런 ‘선전포고’의 밑바닥에는 최근 매니지먼트사들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충무로 진입을 본격화하는 이동통신사들에 대한 기존 충무로 토착자본의 견제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관객이 원하는 것은 ‘충무로 제작사가 만든 영화’도, ‘매니지먼트사가 만든 영화’도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고단한 삶의 시름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좋은 영화’일 뿐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