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관철동 시네코아 극장에선 영화 ‘에로스’의 시사회가 열렸다.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만든 중국의 왕자웨이(王家衛), ‘오션스 일레븐’을 연출한 미국의 스티븐 소더버그, 이 시대의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출한 이 화제작을 보기 위해 250여 명의 영화평론가와 영화담당 기자가 모여들었다.
세 번째 옴니버스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위험한 관계’(소제목)가 상영될 때였다. 권태기에 접어든 중년 남자가 한 외간 여자를 집적대는 장면이 나오다 시추에이션이 갑자기 바뀌었다. 이 외간 여자와 중년 남자의 아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것도 화면의 위아래가 뒤집힌 채. 나체의 두 여자는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스크린 위쪽의 땅을 딛고 스크린 아래쪽의 하늘을 향해 펄쩍펄쩍 뛰었다.
장내엔 고요가 흘렀다. 기자의 머릿속에는 순간 이런 해석이 스쳤다. ‘역시 거장은 다르구나. 93세의 노장 감독이 여인의 나체를 거꾸로 세움으로써 몸이 자유를 획득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구나.’
이렇게 10분이 흘렀다.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지며 안내방송이 나왔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영사기에 (영화) 프린트를 거꾸로 걸어 위아래가 뒤집힌 채 상영됐습니다.”
잠시 후 영화는 ‘제대로’ 다시 상영되기 시작했다. 문제의 나체 장면은 위아래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영화의 결말 부분이 순서마저 뒤바뀌어 미리 상영된 것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평론가들과 기자들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였다.
“졸다가 문득 눈을 떠 보니 벌거벗은 여자들이 거꾸로 뛰어다니는 거 아니겠어요? 거장이니까 또 이런 실험을 했나 보다 하고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죠.”(예술영화 전용관 관계자)
“감독이 위아래를 뒤집음으로써 인간 육체에 대한 매혹적인 시선을 드러내려는 줄 알았어. 사고인 줄 까맣게 몰랐지, 뭐(웃음).”(익명을 요구한 영화평론가)
기자는 부끄러웠다. 거장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역시’ 하고 대단한 듯 받아들이는 영화계의 우스꽝스러운 자화상을 본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말이 떠올랐다.
이승재 문화부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