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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개인감정서 집단문화로…위험수위 ‘증오 문화’

입력 | 2005-06-27 03:11:00

한국사회에서 ‘증오’가 개인적 감정을 넘어 집단적인 문화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왼쪽부터 커플을 증오하는 싱글전사‘엔비 레인저’가 연인의 꽃을 발로 차는 장면, 한국 어린이가 일장기를 영정처럼 그린 그림, 한 여성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 ‘친절한 금자씨’ 포스터,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 유가족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최전방 감시소초(GP)에서 동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김동민 일병은 “(동료들이) 미워서 그랬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김 일병만이 아니다. 아내가 밉다며 살해한 뒤 토막내 방바닥에 묻고 3년간 살아 온 남편이 있는가 하면 4000원을 안 갚는다고 친구를 때려 죽음에 이르게 한 고교생, 두 살배기 아들이 밉다고 강에 던진 20대 어머니도 있다. 특정 개인을 겨냥한 인터넷 마녀사냥은 집단광기에 가깝다. 노무현 대통령은 ‘증오와 분노’를 해소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한국사회의 일상에는 증오의 문화가 만연해 있다.》

▽증오문화 전방위로 퍼진다=최근 누리꾼(네티즌)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게임 동영상 ‘엔비 레인저(NB RANGER)’는 커플들을 증오하는 싱글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다. 특수부대원 ‘레인저’와 질투, 부러움을 뜻하는 ‘엔비(Envy)’가 합쳐진 ‘엔비 레인저’는 놀이동산의 공중 관람차 안에서 분위기 잡는 커플의 차를 휘휘 돌리고, 여자에게 무릎 꿇고 프러포즈하는 남자의 꽃다발을 걷어차는 난동을 피운다. ‘멋지다’ ‘재미있다’가 누리꾼들 대부분의 반응이다.

대중가요 가사는 더 노골적이다. 헤어진 연인을 증오하는 ‘브라운아이드소울’의 ‘해주길’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널 힘들게 만들길/혼자 해결하기 힘든 벅찬 일이 생기길/내가 사랑하는 니가 불행하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김윤아는 ‘유리가면’에서 아예 ‘증오는 나의 힘/매일 내일은 당신을 죽이리라…증오는 증오를 낳고’라고 노래한다.

여름철 극장가는 공포물이 단골 메뉴이지만 올여름은 유난히 공포 잔혹 누아르가 유행인 것도 증오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피부병 때문에 ‘왕따’를 당하자 증오와 복수심에 살인을 저지르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은 끊임없이 귓전을 울리는 전기톱 소리를 배경으로 숨쉴 틈 없이 빠르고도 잔인한 방식의 살인극이 계속된다. 개봉 전부터 관심을 끌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 씨’도 한 남자 때문에 13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한 여성이 출소 후 벌이는 증오 어린 복수극이다.

▽어린이들까지 증오에 물든다=최근 인터넷에서 번지고 있는 한국 어린이들의 독도 그림도 충격을 준다. 외국인 학원 강사가 지하철 역사에 전시된 그림을 찍어 올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들은 한반도를 토끼, 일본 열도를 ‘토끼 똥’으로 묘사하거나, 일장기를 영정으로 만들거나 모닥불에 태우는 것도 있고, 일본 열도를 핵미사일로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이 그림들에는 “애국심도 좋지만, 순진한 어린아이들까지 지나치게 감정에 휩싸이도록 분위기를 제공하는 어른들이 더 문제다” “건전한 애국심과 편견에서 비롯된 증오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외국인들의 영문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원인과 해결책은=문화평론가 남재일 씨는 “엄격한 사회 규율, 치열한 경쟁을 완화해 줄 합리적인 규범의 부재로 인간 본연의 잠재적 폭력성을 풀 기회가 줄어든 데다 직접소통 대신 휴대전화, 메신저 등을 통한 간접소통이 주를 이뤄 삭막한 인간관계를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뼈대는 있지만 이를 완화하고 움직이는 연골(놀이문화)이 없다 보니 증오의 에너지를 발산할 통로가 없다. 결국 참고 참다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익명성 뒤에 숨어 특정인을 죽이고 살리는 인터넷 문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서기원(30·유학준비·서울 서초구 반포동) 씨는 “최근 벌어진 지하철 ‘개똥녀 사건’은 지하철 문화를 개선하자는 쪽으로 발전해야 할 경미한 사건이었는데도 사건의 주인공 얼굴과 신원이 밝혀지고 집단 비난하는 인신공격이 되었다”며 “마녀사냥 식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데 쾌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증오의 해결은 쉽지 않다.

최근 나온 ‘증오’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서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원제 ‘Why We Hate’·사이언스북스)의 저자 러시 도지어 주니어는 ‘증오는 동정과 연민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포용력을 차단하며, 희생양들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거의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며 ‘자신과 타인을 계도하라’ ‘복수 대신 정의를 구하라’ 등 10가지 극복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별 설득력이 없어 오히려 안타깝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대량실업, 부동산시장 불안정이 낳은 빈부 양극화, 장기 경제 불황, 경쟁 지상주의 등이 만연하면서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가 불행해지고 있다는 생각들이 ‘집단증오’로 이어지고 있다며 무엇보다 경제난과 실업 해결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