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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선생 56주기]“나라 없던 시절…조국의 군인되는게 꿈”

입력 | 2005-06-27 03:11:00


“나라가 없던 시절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는 것은 큰 꿈이었어요. 광복 후 나라는 더 잘 살게 됐지만 젊은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군요.”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 56주기 추모식을 하루 앞둔 25일. ‘백범김구기념관’의 김신(金信·83·사진) 관장은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추모식 일정과 준비작업을 검토하느라 아침부터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기념관에 나와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함께 맡고 있는 그는 백범의 차남으로 2남 3녀 중 유일한 생존자다.

1922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난 그는 백범을 따라 독립운동을 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중국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비행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그는 1947년 9월 귀국한 뒤 이듬해 4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백범을 수행하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金日成) 주석을 만났다.

“아버지에게 누가 되기 싫다”며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 오던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가슴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1시간여에 걸쳐 털어놓았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1994년 이후 처음.

겸손하면서도 단호하고 강직한 백범의 모습을 빼닮은 김 관장은 “귀가 조금 안 들려서 그렇지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건국 초기 일부 지도자가 민족을 배신하고 호의호식할 때 아버지는 민족에 대한 걱정을 하루도 안 한 날이 없었어요.”

그는 암살된 지 20여년 만에 백범의 동상이 서울 남산에 세워진 이후 3년 전 기념관이 완공된 것을 계기로 아버지의 ‘애국사상’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화를 나누던 김 관장은 “요새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국적을 포기한다니 가슴이 미어진다”며 다소 격앙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애국애족 정신은 감정적인 민족주의와는 다르다”며 “나라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힘인 애국애족 정신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후세 교육에 힘쓰는 것이 56년 전 흉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잇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일 관계와 관련해 그는 “분명한 사실은 일본은 가해자이고 우리는 피해자라는 점”이라며 “최근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드러났듯 일본은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백범 재조명 운동’으로 화제를 바꾸자 김 관장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 아버지를 항일운동의 동지로 표현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어요. 몇몇 방송국에선 아버지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이 9월 3일을 반파시스트 항일운동 승리 60주년으로 삼고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불고 있는 재조명 운동이 우리의 광복 60주년과 맞물려 한중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26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56주기 추모식. 신용하 백범학술원장(왼쪽) 등이 헌화하고 있다. 권주훈 기자

▼ 백범 56주기 26일 추모식▼

백범 김구 선생 서거 56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회장 김신)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는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을 비롯해 박유철(朴維徹) 국가보훈처장, 김국주(金國柱) 광복회장, 유가족 등 각계 인사 400여 명이 참석했다.

백범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을 지냈으며 광복 후인 1949년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