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불법 체류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166억 원의 불법 외환거래를 알선한 현직 은행 지점장 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에게 불법 외환거래를 부탁한 한국인은 3년간 6226명에 이른다.
▽수사 결과=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는 국내 은행의 차명계좌를 통해 166억 원의 불법 외환거래를 알선한 혐의(외국환거래법 위반)로 A은행 지점장 김모(49) 씨 등 전·현직 은행원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6일 밝혔다.
경찰은 또 이들에게 불법 외환거래를 부탁한 재일 불법체류 한국인 등 122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 한국인은 2002년 5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일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환치기 브로커 박모(34) 씨가 만든 차명계좌 7곳을 통해 불법 외환거래를 했다.
김 씨를 비롯한 전·현직 은행원들은 박 씨에게서 차명계좌 관리를 부탁받고 박 씨가 일본에서 송금한 외국환을 매각해 원화로 바꾼 뒤 박 씨의 다른 국내 계좌로 송금했다.
박 씨는 인터넷뱅킹을 통해 이 돈을 송금 의뢰인이 지정한 계좌로 입금해 주고 수수료를 챙겼다. 경찰은 환치기 수수료를 송금액의 3∼10%로 보고 있다.
박 씨의 ‘주요 고객’은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힘든 일본 내 불법체류 한국인. 일본에서 수출 대금을 송금 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박 씨의 계좌를 이용한 수출업자도 있었다.
경찰은 일본에 체류 중인 박 씨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일본 인터폴에 공조수사를 의뢰했다.
▽은행원들의 도덕적 해이=이번 환치기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은행원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점.
박 씨는 당초 A은행의 다른 김모(49) 지점장에게 차명계좌를 맡겼다. 그러나 이 지점장이 대출비리로 구속되자 이번에 적발된 김 씨에게 계좌 관리를 부탁했다.
김 씨는 차명계좌의 예금주 이름으로 도장을 만든 뒤 외국환 매각과 환전, 송금 등 대부분의 외환거래를 담당했다.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융업 종사자는 자금의 불법거래가 의심되는 경우 즉각 재정경제부 산하 금융정보분석원에 통보해야 한다.
은행원들은 불법 외환거래를 통보하지 않고 오히려 환전 시 우대금리를 적용해 박 씨가 많은 환차익을 얻도록 도와줬다.
김 씨 등은 경찰에서 “외국환 매입 실적을 높이기 위해 환치기를 했을 뿐 어떤 금품도 주고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은행원이 차명계좌를 직접 관리하고 불법 외환거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든 편의를 봐준 것은 단순히 실적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주범인 박 씨가 검거되면 사건 연루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