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통신회사에 다니는 무라시마 아야토(村嶋綾人·30·여) 씨 가족은 이 나라 저출산 현상의 표본 집단 같다. 5남매 중 막내인 그를 포함해 3명이 미혼이며 결혼한 남매 중 언니만 아이를 낳았다.
무라시마 씨는 “결혼은 선택이고 만일 35세 이후 결혼하면 아이는 낳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혼인 두 오빠도 1980년대 ‘버블시대’를 겪으면서 눈이 높아져 요즘 같은 불황기에 결혼 대신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한 곳인 스페인은 예전엔 대가족 전통이 강한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녀가 3명인 집을 찾기 힘들다. 최근 마드리드 교외에서 만난 여성 아나 아르타사 히메네스(36) 씨도 두 살짜리 아들 한 명으로 가족계획을 마쳤다.
“남편과 내 월급에서 생활비, 양육비를 빼면 월 1300유로(약 159만 원)인 집세 내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더 갖는 건 모험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자녀수가 5, 6명인 경우가 흔했지만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바람에 지금은 한 자녀가 대세다. 1960년대 초반, 1970년대 중반, 2005년 가족 사진들(왼쪽부터)이 한국 가족의 급격한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인터뷰한 것으로 보일 만큼 한국과 상황이 비슷하다. FnC코오롱에 다니는 조은주(38) 차장은 10년여 전 결혼할 때 남편(42·영화 프로듀서)과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유는 “부모님이 나를 키운 만큼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고, 아이를 잘 키우자면 일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 지구촌, 저출산 비상
1970년대 유럽에서 시작된 출산 감소 현상이 21세기 초반 들어 한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를 강타하고 있다.
인구가 현 수준을 유지하는 대체출산율 기준은 2.1명. 그러나 지금 추세대로라면 지구상의 몇몇 국가가 종래에는 인구가 줄어 멸망한 고대 로마처럼 나라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은 이 같은 ‘저출산 신드롬’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3명에서 2003년 1.19명으로 떨어졌다. 출산율은 세계 꼴찌이지만 줄어드는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한국의 저출산은 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1962년 가족계획사업이 시작된 뒤 1983년에 합계출산율이 2.1명 이하로 떨어졌지만 정부는 1996년까지 출산억제정책을 유지했다. 게다가 여성의 사회활동이 느는데도 여전히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육아시스템, 지나치게 높은 사교육비 부담은 한국에 세계 최저 출산국의 타이틀을 안겨 주었다.
○ 950년 후 한국 인구 멸종?
인구학회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이 1.2명으로 지속될 때 현재 4846만 명인 한국 인구는 2015년 4904만 명을 정점으로 줄기 시작해 35년 후인 2040년엔 4287만 명, 50년 후인 2055년엔 3448만 명, 2300년에는 31만4262명만 남게 된다. 인구학회가 가정한 이 시기의 안정인구성장률(―1.92%)을 적용해 계산을 연장하면 한국은 2954년에 단 한 명도 남지 않는 멸종을 맞게 된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합계출산율이 1.29명으로 한국보다 높지만 저출산이 먼저 시작된 일본은 인구 감소 시점이 2007년으로 코앞에 닥쳤다.
일본 게이오대 경제학과 즈야 노리코(津谷典子) 교수는 “일본은 이미 인구감소를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한국은 일본이 어떻게 변하는지 냉정히 보면서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도 낙관할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난해 15∼49세의 가임여성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2016년이면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들기 시작하며 2020년엔 65세 이상 노인이 14세 이하 유소년보다 많은 ‘인구의 대역전’ 현상이 시작된다. ○ 출산장려 구호 대신 가족 지원을
인구는 한번 줄면 회복되기 어려운 속성을 갖고 있다. 특히 1.5명 이하로 떨어진 합계출산율이 회복된 사례는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2003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 실태조사’에 따르면 15∼44세의 기혼여성 6599명이 응답한 평균 이상 자녀수는 2.2명이었다. 사회경제적 여건만 마련되면 합계출산율 1.19명을 2명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단서다.
프랑스 스웨덴은 1970년대 출산율이 계속 줄다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복된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스웨덴에서 만난 안나 마리아 블링스(33·여) 씨는 “요즘 ‘신(新) 베이비 붐’이라고 할 정도로 아이 낳는 게 유행”이라고 전했다. 스톡홀름의 버스와 지하철, 공원과 거리 곳곳에서 어린아이와 마주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스웨덴 보건사회부 안데르스 이크홀름 계획·조정국장은 “1990년대 초 깊은 불황으로 출산율이 떨어졌지만 경기가 회복되자 곧 올라갔다”면서 “이는 가족을 지원하는 튼튼한 사회보장제도가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위베르 브랭 국립가족단체연합 회장은 “프랑스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정부, 기업주, 노조, 시민단체, 각종 관련 기관이 모두 참여하는 가족 관련 회의가 총리 주재로 열린다”고 소개했다. 그는 “수당을 조금 올려 주고 휴가를 늘려 주는 부분적 인센티브로 출산율이 회복되진 않는다”면서 “가족지원, 양육 사회화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드리드=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도쿄=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인구경쟁력지수와 합계출산율▽
각국의 인구경쟁력지수(위쪽)는 인구규모, 부양비율 등 5개 항목의 점수 평균이다. 이 지수 비교에서는 저출산 문제가 ‘미래를 볼모로 잡는 시한폭탄’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페인 일본의 인구경쟁력도 떨어지고 있지만 한국은 그래프가 급전직하하고 있다. 반면 고령화 충격이 시작된 뒤 출산율이 회복된 스웨덴은 고령인구, 유소년인구 비중이 높아 올해 인구경쟁력이 27위에서 2050년에는 9위로 대폭 오를 전망이다. 합계출산율 비교표(아래쪽)를 보면 2003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1970년의 26% 수준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