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기 변신을 꾀하고 있다면서요.”(기자)
“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메릴린 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철자는 아시나요.”(기자)
“오, 저는 제가 말하는 단어의 철자는 하나도 몰라요.”(먼로)
‘텅 빈 머리의 금발 미녀’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히 비꼰 대답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먼로가 연기자로 거듭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는 성적 매력을 부각시켜 스타에 올랐지만 할리우드가 자신에게 만들어 준 그 이미지와 화해할 수 없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메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집중적인 연기수업을 받으면서 이미지 변신에 나섰다. 1956년 6월 29일 먼로는 그의 생에서 가장 지적(知的)인 일을 해냈다. 당시 뉴욕 문화계를 주름잡던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한 것이다.
이들의 결합은 ‘부부관계’라기보다 ‘사제관계’에 가까웠다. 당시 먼로는 과거 남편이던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이혼한 직후였다. 먼로는 사랑하기보다 존경할 수 있는 남성을 원했다.
1950년대 미국 대중사회는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많은 예술인이 매카시즘에 맞서 지성적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시절, 할리우드에서는 ‘금발의 백치미’라는 비지성적 상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 모순의 한가운데 선 먼로와 밀러의 만남 역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밀러에 대한 먼로의 지적 열등감으로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다.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려는 먼로의 꿈도 멀어졌다. 밀러는 먼로의 연기력을 살릴 수 있는 각본을 썼지만 영화는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실패로 끝났다.
먼로와 밀러는 1961년 1월 이혼했다. 결혼 4년 7개월 만이었다. 약물에 의존하던 먼로는 이혼 1년 7개월 후 숱한 억측을 남긴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올해 초 세상을 뜨기 전까지 먼로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말을 아꼈던 밀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끔찍한 사실이었다. 내가 알던 여자는 ‘메릴린 먼로’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메릴린 먼로’로 살아야 했다. 우리의 결혼은 그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죽였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