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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차병직]생명윤리, 법에만 맡길순 없다

입력 | 2005-06-29 03:16:00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언뜻 떠올리기엔 정치 제도나 경제 정책 따위다. 물론 그 실존적 힘은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나 경제처럼 강력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인류 역사에서 진실로 큰 변화를 이끈 것은 과학기술이다. 그 영향력은 미래에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생활의 편리함을 넘어서, 삶의 질 자체에 직접 관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의 문제도 사상이나 이념보다 내일의 과학기술에 따라 더 좌우될 수 있다.

그나마 우리 사회에서 모든 구성원으로 하여금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는 황우석 교수팀의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 성과와 과정이다. 마치 대중문화의 신화를 만들어 내듯 언론이 경쟁적으로 나서 황우석 이야기는 하나의 인기상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 자체는, 설사 다소 과장이 섞였다 하더라도, 긍정적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새로이 기대되는 이 과학혁명을 바라보는 윤리적 시선이다. 다행스럽게 이곳저곳에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견제와 반론의 뜻으로 내세우는 말들이 한결같다. 뭔가 새롭게 전개될 충격적 현상의 본질에 닿아 있지 않는 어휘들로 형식적 걱정만 하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내세워 연구에 반대하거나 신중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과학기술은 일단 성공하면 이미 존재의 일부가 돼 버린다. 그런데 막연히 인간의 존엄성만으로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표현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윽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가끔 우리는 그것이 인권과 윤리에 얽힌 모든 복잡한 문제를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의 목적이자 이념적 구호이지 수단이 아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기준이 따로 필요하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속도조절장치로서 기능하고자 하는 윤리 기준은 더 정치하고 섬세해야 한다.

황 교수팀이 이끄는 생명과학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면, 우리의 생명윤리에 관한 기준과 내용도 그 수준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전문가들 사이의 활발한 논쟁이 선행하고, 그 전문적 지식을 토대로 다른 전문가들이 가세해 윤리적 담론을 형성하고, 그리고 보통 시민들이 그 결과를 이해하면서 토론자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과학 지식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급선무다.

만약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3월에 어느 단체는 체세포 복제 배아의 생성과 연구를 허용한 생명윤리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가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둬도 괜찮은 것인가. 위헌이든 합헌이든 결정을 하면, 곧 그 결론이 세계에 내세울 우리의 생명윤리 기준이 되어도 좋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최악의 상황이다. 비록 재판 과정에서 전문적 의견을 참고하겠지만, 헌재가 기댈 기준이란 역시 추상적인 인간의 존엄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한 인권의 가치개념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 전에 모든 사회적 논의를 해내야 한다. 오히려 헌재가 전문적이면서 일반적인 사회공론의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다.

이상은 원대하나 지식은 짧다. 의무를 인식하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인구에서 생물학 또는 그와 관련된 자연과학 전문가를 제외한 나머지 수는 얼마일까. 그리고 그 비전문가들의 생명윤리적 관심에 대응하는 생명공학적 지식의 이해는 어느 정도일까. 문과와 이과로 사정없이 나누어 버리는 중고교 교육은 무엇이며, 이공계 대학의 현실은 어떠한가. 세계 수준의 윤리 기준 마련이란 의무를 감당해야 할 우리의 밑바탕이 새삼 걱정된다.

이미 46년 전 찰스 퍼시 스노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한 강연의 한마디는 우리 과학 교육의 실태를 반성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문과계 사람들이 열역학 제2법칙을 모르는 것은, 이과계 사람들이 셰익스피어가 누군지 모르는 것과 같다.”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