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은행의 첫 번째 임금피크제 대상자인 홍경석 부장(왼쪽)이 지난달 29일 인천 서구 당하동 ‘네오세미테크’ 공장에서 이 회사 오명환 사장(오른쪽)으로부터 화학반도체 제조 공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인천=박중현 기자
《2003년 11월 국내 제조업체 가운데 처음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대한전선은 노동조합이 먼저 ‘위기’를 느끼고 회사 측에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하루 임금 3만1000원 이상인 근로자들은 일단 퇴사한 뒤 10% 깎인 임금을 받고 다시 입사했으며 만 50세 이상 근로자들은 정년까지 임금이 동결됐다. 이후 이 회사의 전체 임금은 늘지 않았고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경영 실적도 좋아지고 있다. 대한전선 노조 우관제(禹寬濟) 교육부장은 “전선 업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임금피크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면서 “반신반의하던 직원들도 요즘은 정년이 보장됐다는 데 만족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금피크제 도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하지만 노사 양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도입하기 힘들다는 점도 분명하다.》
○ 금융권과 공기업 중심으로 확산
국내에서는 신용보증기금이 2003년 7월 임금피크제를 처음 도입한 뒤 특히 금융권과 공사(公社) 등을 중심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金廷翰) 연구위원은 “금융권이나 공사에서 이 제도를 많이 도입한 이유는 임금이 다른 직장에 비해 높아 인건비를 줄여야 할 필요가 있는 데다 직원들은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 등으로 정년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국내 기업이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은퇴 이후에 정년을 연장해 시행하는 일본의 ‘고용 연장형’과 달리 ‘정년 보장형’의 성격을 띤다.
최근에는 현대자동차 측이 단체협상에서 임금피크제를 요구하고 나서 제조업 쪽에서도 이 제도의 도입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대차 울산공장 관계자는 “50세 이상 생산직 근로자의 비율이 8.6%로 높아지는 등 고령화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계속 늘어나고 노조와의 약속 때문에 정년은 보장해줘야 하는 상황”이라며 “올해 타결이 안 되더라도 앞으로 매년 노조 측에 임금피크제 도입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5단체도 6월 중순 내놓은 올해 임금 단체협상 가이드라인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신입사원 채용 늘리는 ‘윈윈 전략’
이미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일부 기업은 절감된 인건비를 신입사원 채용 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신용보증기금은 임금피크제가 적용된 직원 한 명당 연간 3700만 원의 인건비를 절약해 지난해 말 신입사원을 뽑을 때 공고를 냈던 50명보다 10명이 많은 60명을 채용했다. 수출입은행도 지난해 말 임금피크제 시행을 전제로 전년도의 37명에서 50명으로 채용 인원을 늘렸다.
임금피크제가 적용된 직원들의 업무 성과도 대체로 좋은 편이다.
신보 관계자는 “만 55세 이상으로 채권회수 업무를 맡고 있는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들이 1인당 연간 평균 2억5600만 원의 특수 채권을 회수하는 등 경험을 살려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직원까지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분류돼 의욕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도 나오고 있다.
정년을 5년 앞둔 만 52세 사무직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은 임금피크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 제도’를 두고 있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만 54세 이후에는 임금이 동결되지만 전문성을 인정받은 직원은 나이에 관계없이 ‘전문가’로 선정돼 임금과 성과급이 계속 늘어난다.
○ 전제조건은 노사 간 신뢰
하지만 임금피크제 도입이 쉽지만은 않다.
노조의 힘이 강해 이미 정년이 보장된 기업에서는 회사가 원해도 노조 측이 직원들의 임금만 줄어들게 된다며 강력히 반대한다. 또 쉽게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업종에서는 회사가 정년 보장을 해 주길 원치 않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높고 정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금융권, 공사 등에서 임금피크제가 많이 도입된 것도 이 때문이다. 노사 간 신뢰가 약한 기업에서는 ‘임금 감소, 정년 보장’이라는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어 합의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또 한국의 기존 임금시스템이 대체로 젊을 때는 일한 것보다 덜 받고, 나이 들어서는 일한 것보다 더 받는 형태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는 50대 근로자들의 반발도 예상된다.
LG경제연구원 이춘근(李春根) 상무는 “미국식 연봉제에 비해 임금피크제가 기업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고령화-저(低)성장-고(高)임금에 따른 문제점이 커지고 연봉제로 전환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임금피크제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김두영 기자 nirvana1@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日기업 70% 고령자 고용확대제 실시▼
이미 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에서는 2000년 이후 임금피크제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연공서열에 따라 임금이 늘어나는 연공급제(호봉제)식 임금체계가 보편적이어서 연령 상승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연봉제가 보편화된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는 임금피크제가 필요하지 않다. 근로자가 나이가 들어 생산성이 떨어지면 연봉도 줄어든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2001년부터 2018년까지 단계적으로 연금 지급개시 연령을 60세에서 65세로 늦추고 있다.
이에 따라 은퇴 후 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이 필요해졌다. 이런 상황과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임금피크제 도입이 빨라졌다. 현재 일본 기업 가운데 70% 정도가 ‘고령자 고용확대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일본 임금피크제의 특징은 정년을 연장하는 방식이 많다는 것.
산요전기는 2000년 4월부터 고용연장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 회사의 정년은 60세. 직원들은 55세가 됐을 때 60세에 정년퇴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최고 65세까지 연장 근무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60세 이후에 근무하길 원하면 55세 때의 임금을 정점으로 임금이 점차 줄어든다.
미쓰비시전기의 임금피크제는 정년인 60세 이후 계속 근무하려면 연장 근무를 하려는 기간만큼 앞당겨 퇴직해 재입사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63세까지 근무하려면 58세에 일단 퇴직한 뒤 5년간의 재고용 계약을 맺는다(기준 연령 60.5세). 이때부터 정년까지는 퇴직 시 임금의 80%를, 그 이후부터 희망 근무가 끝날 때까지는 퇴직 시 임금의 50%를 받는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정부, 임금 삭감분 일부 지원 검토▼
정부는 5월에 ‘영세 자영업자 대책’을 내놓으면서 임금피크제 도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직장을 잃은 40대 및 50대 근로자가 영세 자영업자로 계속 유입되는 한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자영업자 비중을 낮추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업에 실패해 빈곤층으로 전락한다면 국민연금 등을 받는 만 60세가 될 때까지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
통계청은 한국 인구가 2000년 고령화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 7% 이상∼14% 미만)에 들어섰고 2018년에는 고령사회(14% 이상∼20% 미만)로 진입해 2026년 초고령사회(20% 이상)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16년을 정점으로 15∼64세의 생산가능 인구도 감소해 머지않은 장래에 노동력 부족으로 45세 이상 중(中)고령층이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가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노동부는 고용보험 기금 중 일부를 임금조정 지원금으로 돌려 임금피크제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임금피크제로 삭감된 임금의 일부를 정부가 보전해 줌으로써 이 제도를 도입하는 기업을 늘리겠다는 것. 그러나 섣불리 지원금을 지급하면 사업주들이 임금피크제 대상자의 임금을 더 낮추는 등의 ‘모럴 해저드’가 발생할 수 있어 고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임금피크제 확산을 위해 정부가 적용 대상자의 소득세율을 낮춰 주거나 소득공제 혜택을 늘려 주는 등의 지원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