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래핑보아
《‘남자들에게 희롱당해 자살한 처녀가 귀신이 되어 복수한다.’ 줄거리는 딱 한 줄이다.
곁가지 이야기도 거의 없다.
귀신은 나타나야 할 딱 그 타이밍에 어김없이 나타나고, 상상하는 딱 그 모습(긴 머리 풀어헤치고 입가에 피 질질 흘리는)이며, 예상하는 딱 그런 행동(침대 모서리에 서 있거나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을 한다.
게다가 ‘사진에 불현듯 찍히는 귀신’이라는 핵심 아이디어도 새롭지 않다.
태국 공포영화 ‘셔터(Shutter)’는 이렇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것들의 총집합이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셔터’는 화려한 컴퓨터그래픽과 촬영기교, 배배 꼬이는 이야기구조가 넘쳐나는 요즘 공포영화들에 분명 경종을 울리는 바가 있다. ‘태국판 전설의 고향’이라 할만한 이 영화는 단순명료한 제목처럼 기본기에 충실한 것이다.
사진작가 턴(아난다 에버링햄)은 여자친구 제인(나타웨라눗 통메)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대학동창회에 다녀오던 길에 실수로 한 여자를 치게 된다. 두 사람은 두려움에 뺑소니를 친다. 이후 이들의 눈에는 귀신이 보이고, 사고현장으로 다시 가 본 턴은 이 장소에서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한다.
턴의 대학동창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 둘 자살하고, 턴과 제인은 사진에 찍히는 귀신의 실체를 파고든다.
‘셔터’의 묘미는 이른바 ‘5% 비틀기’에 있다.
이야기와 이미지의 95%가 기존 공포영화의 성공공식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시속 120km로 달리는 자동차 차창 밖에 귀신 얼굴이 불쑥 보이고, 자다가 깨어 보면 침대 끄트머리에 귀신이 서 있으며, 거꾸로 매달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귀신이 천장을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타나고, 전깃불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그 순간 눈앞에 서 있는, 귀신 출현의 타이밍조차 촌스러울 만큼 정도(正道)를 걷는다.
그러나 영화는 나머지 5%를 비틀어서 무척 신선한 공포영화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귀신을 피해 사다리를 내려오던 주인공이 갑자기 위를 쳐다본다. 으악, 그 순간 귀신이 사다리에 거꾸로 매달려 쫓아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귀신을 ‘뒤집음’으로써 영화는 거의 심장이 얼어버릴 정도의 인상적 장면을 심는다. 날카로운 금속성 효과음도 끔찍한 비주얼과 긴밀히 대화하면서 공포 체감지수를 끌어올린다.
구천을 떠돌다 이젠 편히 잠들었을 줄로만 믿었던 처녀귀신이 알고 보니 주인공인 ‘턴’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어딘지 상상해 보라)에 늘 있었음을 드러내는 마지막 대목은 길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흔히 듣는 얘기(“어깨에 동자가 앉아 있군요. 도를 믿으십시오” 같은)지만 여전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셔터’는 관객의 예측을 벗어나기보다는, 역으로 관객의 예측을 고스란히 실현시키는 방식을 통해 공포심을 촉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주얼의 무게에 비해 이야기의 무게가 다소 가벼운 것이 사실이다. 귀신이 벌이는 일련의 복수극이 ‘오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처녀귀신이 벌이는 복수의 잔인무도한 비주얼에 비해 귀신에 얽힌 사연(집단 따돌림과 성폭행)은 마치 뻔한 내용을 보여 준다는 듯한 안일한 태도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인 ‘나트레’ 역의 아치타 시카마나는 말 그대로 ‘귀신 뺨칠 정도’의 캐스팅이다. 귀신 분장을 했을 때보다 그냥 가만히 있을 때(죽기 전 모습)가 100배는 더 무서운 이 여배우는 호러 영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만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면, 그건 피범벅된 귀신의 모습이 아니라 이 여배우가 무심하게 전방을 직시하는 얼굴을 담은 ‘영정 사진’이다. 역시나,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다.
반종 삐산타나꾼, 빠륵뿜 웡뿜 두 신예 감독이 공동 연출해 지난해 태국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로 기록됐다. 30일 개봉. 15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