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런 가족들과의 헤어짐은 고통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강하다. 신재준(왼쪽) 황만규 씨 등 두 ‘기러기 아빠’가 휴가를 맞아 멀리 떨어진 가족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1월 자녀들의 조기 유학을 위해 떨어져 사는 한국 ‘기러기 가족’의 애환을 3개 면에 걸쳐 소개했다. 이 신문은 기러기가 먼 거리를 여행하며 새끼들의 먹이를 구해 온다면서 자녀 교육을 위해 부부가 헤어져 사는 기러기 가족의 유래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경을 넘어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은 ‘초국적 가족(Transnational Family)’ 또는 ‘다국적 가구(Multinational Household)’로 불린다. 일부에서는 2000년 이후 통신 수단의 발달로 늘어난 ‘온라인 접촉’에 포커스를 맞춰 ‘N(network)패밀리’로 부르고 있다.
여름 휴가를 맞아 가족을 찾아 떠나는 한국 ‘기러기 아빠’들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항공사들은 최근 원화의 강세와 여름 휴가가 겹쳐 기러기 아빠의 출국이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기러기 아빠들의 대이동.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빈자리가 되어야 했던 아버지와 남편의 자리를 채우기 위한 날갯짓이다.
지갑 속 사진은 지난해 영국에서 함께 휴가를 보낸 신재준씨 가족의 단란한 모습.
○ 기러기 아빠의 여행 수첩
중소 무역회사 대표인 김흥곤(44) 씨는 3년째 기러기 아빠로 지내고 있다. 2003년 8월 송이(12) 동환(10) 등 남매와 부인 김명옥(42) 씨를 중국 지린(吉林) 성 창춘(長春)으로 보냈다. 어릴 때부터 어학에 재능을 보인 아이들이 유학을 원하자 기러기 가족이 된 것.
그는 휴가를 맞아 10일 가족을 만나러 중국으로 간다. 그는 “요즘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즐겁지만 준비할 것도 많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요즘 화상 채팅을 하면서 가족이 필요하다고 하는 물품을 적고, 따로 생각나는 것을 수시로 메모하고 있다.
‘송이는 감자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 냉동해서 얼려갈 것. 동환이는 오징어 젓갈과 자장라면 먹는 꿈을 꾼다고 했다.’
그는 아내를 위해 영양제를 구입했고 백화점에서 여름옷과 화장품도 살 예정이다. 미숫가루는 시골에 있는 형수, 김치는 어머니께 부탁했다.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부쩍 커버린 송이와의 대화다. 얼마 전 딸이 초경(初經)을 했다는 소식을 아내에게서 들었다. 성교육과 관련된 책과 송이가 갖고 싶다는 MP3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송이를 위한 성년 축하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다면 벌써 했어야 하는데….”(김 씨)
유난히 아빠를 따르는 아들도 안심시켜야 한다. 얼마 전 “아빠 밥 먹었어?”라는 말에 무심코 “그냥 라면으로 때웠어”라고 했다 아이가 우는 바람에 전화를 끊고 혼자 울기도 했다. 요즘 채팅을 하면 ‘아빠, 밥 먹었어?’ ‘왜 늦게 들어와’ ‘일요일에는 다른 가족 나들이가 많으니까 외출하지 말라’는 등 아들의 잔소리가 부쩍 늘었다.
언젠가 돌아와서 한국에 정착해야 할 아이들을 위해 한국 위인전과 역사책도 준비하고 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늘 가족과 함께 있다.
○ 문제는 의사소통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흥곤 씨가 중국 지린 성 창춘에 있는 가족에게 줄 책과 CD 등 준비물을 꾸리다 여권을 펴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러기 아빠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과 세계화의 상호 충돌 과정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동국대 조은(사회학) 교수는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 현상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은 중산층이 자녀교육에 집중함으로써 구체화됐다”고 밝혔다. 정부의 교육 정책이 파행을 빚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으로 혈연적 유대감이 강한 한국의 가족들이 스스로 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기러기 가족은 자녀를 위한 미래 투자형 별거, 중산층 이상, 아내가 아이와 함께 떠나는 특징을 보인다.
기러기 아빠들은 휴가의 목표를 자녀와의 의사소통 등 유대감 회복에 두고 있다. 기러기 아빠 4년째인 최상현(45·의류회사 이사) 씨는 9월 중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호주로 출국할 예정이다. 아들 인호(15) 군과 딸 수진(13) 양이 시드니에서 유학하고 있다.
가족을 위해 그가 생각하는 이벤트는 여행이다. 현지에 가서도 수업과 과외 활동으로 바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겉돌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출국에 앞서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정리하고 호텔 예약도 미리 끝낼 예정이다. 어릴 때부터 바둑을 배워 아마 1, 2급 수준인 아들과의 소통을 위해 바둑을 배우기도 했다.
두 딸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뱅크에서 고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신승근(43·CJ 홍보부장) 씨는 최근 채팅을 하다 ‘지금 나는 누구를 좋아한다’는 큰딸(16) 메신저의 대화명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요즘 휴가 일정에서 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소재를 찾느라 여러 군데에 자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 기러기 아빠의 특별한 휴가
늦둥이 막내딸과 부인이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있는 김기명(57·세무사) 씨는 이미 6월 중순부터 현지에서 ‘특별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
그는 “곧 돌아가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이고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지만, 꼭 떨어져 있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상대방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이 커졌고 집사람과는 만날 때마다 신혼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KT의 신재준(41·경영전략실 비전경영팀 부장) 씨는 올해 초 휴가를 내 영국의 가족들을 만나고 왔다. 그의 가족은 아내가 런던에서 유학을 하고 있어 기러기 가족이 됐다. 그는 휴가 기간 중 영국 남부와 프랑스를 다녀왔는데, 가족의 대화를 위해 일부러 기차 여행을 택했다. 그는 “여행을 하고 난 뒤 아홉 살된 딸이 ‘전에는 아빠가 뭐하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이번 여행에서 아빠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말할 때 가슴이 아팠지만 뭉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내가 유학 뒷바라지를 했지만 나중에 아내가 공부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기러기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아내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기 때문에 휴가 때마다 잘사는 기러기 아빠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합니다.”(신 씨)
같은 회사의 황만규(39·컨버전스 연구소 책임연구원) 씨는 부인이 뉴질랜드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 기러기 아빠가 된 케이스. 그는 “이번 여름 휴가의 주제는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 기러기 아빠의 또 다른 선택
또 다른 선택도 있다.
이달 중 미국에서 가족을 만날 예정인 광고대행사 TBWA코리아의 백승훈(42) 국장에게 이번 휴가는 특별하다. 2년 반 동안 두 자녀를 조기 유학시켰지만 최근 가족과 기러기 생활을 끝내기로 합의해 마지막 ‘기러기 휴가’가 된 것이다. 이번 휴가는 가족이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 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다.
“아이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했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돌아오기로 했다. 지금 돌아오지 않으면 2, 3년 더 걸리는 데 나의 ‘경제적 체력’이 너무 약해졌다. 아이들이 미국에서만 살 것이 아니라면 한국적 체험도 필요하고, 전혀 신경 쓰지 못한 우리 부부의 노후 준비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백 국장)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
▼기러기아빠 한국 특유 현상 자녀위한 미래투자형 별거▼
‘기러기 아빠’는 부부 중심의 생활이 이뤄지는 서양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국내에서 기러기 아빠를 주제로 연세대 대학원 신학과 박사학위 논문(‘비동거 가족경험-기러기 아빠를 중심으로’)을 쓴 최양숙(48) 씨는 “서양에도 비동거 가족이 많지만 남편 혼자 가족과 떨어져 있는 한국식 기러기 가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서구에서는 교육 문제라면 자녀가 홀로 기숙학교에 입학하는 게 대부분이다. 직업상의 이유라면 남편 혼자서 근무지로 이동하거나 부부 또는 가족 전체가 움직인다.
기러기 가족의 사례는 중국 대만 등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미국 일간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2003년 싱가포르에 조기 유학을 온 중국 가족의 문제점을 보도하면서 현지에서 아이를 돌보는 중국 여성이 ‘까마귀 엄마(The Crows)’로 불린다고 전했다. 자녀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다 하는 실태를 고발한 책 제목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최근 경제력이 급성장하고, 한 자녀 가정이 많은데다 싱가포르 등 유학이 쉬운 화교 문화권이 있다는 점이 기러기 가족을 부채질하고 있다.
같은 유교 문화권이지만 일본은 사정이 다르다. 일본에서 일반화된 ‘비동거 가족’ 사례는 ‘단신후닌(單身赴任)’이다.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 받으면 혼자서 근무지로 옮겨 가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고 있는 오니시 도시미치(大西後通·48) 씨는 “명문대 입학을 보장하는 유치원 입학 경쟁이 치열할 정도로 일본의 교육열도 과열이지만 한국 같은 기러기 가족은 드물다”며 “일본에선 영어 외에도 학벌의 중요성과 자녀의 개인적 선택권 등을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왜 유독 한국에 기러기 아빠가 많을까.
한국 교육 정책의 실패와 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 욕구, 경제적 성장과 세계화 등이 맞물려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조은 교수는 “한국의 가족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으며 가족의 형태조차 선택의 문제가 됐다”며 “기러기 아빠는 한국 사회의 치명적, 구조적 결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기러기 가족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자녀를 잘 키우겠다는 목표가 신념화된 사례가 많았다”며 “기러기 아빠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지만 사회 현실 속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