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씨. “글을 쓰다 막막해지면 줄타기 곡예사 필리프 프티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사라져 버린 세계무역센터의 두 빌딩에 줄을 걸고 걸어가던 그 모습을.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정미경 지음/336쪽·9000원·현대문학
‘고슈 캐비아(Gauche caviar)’라는 프랑스 말은 값비싼 캐비아(철갑상어 알)를 즐겨 먹는 좌익이란 뜻이다. 배부른 몇몇 노조 간부들과 풍요를 놓치기 싫은 좌익 지식인들이 화려한 식탁 앞에서 고기를 우물거리며 ‘혁명’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빗댄 것이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에 나오는 사설 펀드매니저 이중호는 교활한 이중가치를 가진 정치인 최한석을 바라보며 ‘고슈 캐비아’라고 생각한다. “머리로는 혁명을, 입술엔 와인을, 가슴속에 천박한 권력욕의 풍선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고슈 캐비아와) 다를 게 없지.”
작가 정미경(45) 씨는 2001년 데뷔했으며, 이듬해 첫 장편 ‘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그의 두 번째 장편인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40대가 돼버려 ‘더 이상 386이라고 불릴 수 없는 386세대’의 사랑과 욕망과 파국을 그렸다.
대학 때부터 야학 활동을 함께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견제해 온 남녀들과, 그 야학에서 배우다 뛰쳐나와 여배우로서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 하는 콜걸이 나온다. 돈과 섹스라는 흔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본격 문학의 관습에 따라 이야기를 쌓아 나간다.
재규어를 타고 시속 180km로 달리곤 하는 펀드매니저 이중호는 광속으로 모니터에 전달된 데이터들을 보면서 부자들의 돈을 키우는 일을 한다. 그에게 출처 모를 큰돈을 갖고 찾아온 손님 최한석은 옛날엔 카리스마가 눈부셨던 운동권의 리더. 지금은 여당 대변인으로 우뚝 선 정치인이 돼 있다.
콜걸 오윤희가 침대에서 맞이하는 고객들 가운데는 이중호도, 최한석도 있다. 특히 최한석은 옛날 야학 교사 시절에 ‘윤자’라고 불렸던 오윤희를 임신시켰다가 낙태하도록 내버려둔 적도 있다. 최한석을 기억하는 후배들은 브라운관에서 열변을 쏟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하게 읊조린다.
‘바야흐로 이 시대엔 제적과 투옥의 경력이 발에 차이는 미제 학위보다 낫지. 누구는 대자보 긁던 손으로 에로 배우 인터뷰 기사 써서 먹고살고, 마르크스 출판한 친구는 책 판 돈으로 강남 한복판에 저택을 지었는데 죄 없는 자 어디 있어 감히 술잔을 날리겠어.’
이중호는 최한석의 돈을 가지고 커다란 도박에 나선다. 바다 속에 가라앉은 보물선 인양에 나선 회사가 저지르는 증시 작전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중호는 노련하지만 이 도박판은 누구든 순식간에 거꾸러뜨릴 수가 있다.
그와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시름없는 땅, 꿈과 같은 나라 ‘원더랜드’로 가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탐욕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그들이 잠시 쳐다본 ‘원더랜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소설은 운동권과 펀드매니저의 세계를 재현해 놓았지만 불안정한 대목들도 눈에 띈다. 운동권의 돌파구를 만들려고 투신자살하기로 한 ‘현오’라는 인물이 자기 때문에 벌어진 ‘동지’들의 논쟁 앞에서 보이는 엉거주춤한 수동성 같은 게 그렇다. “작전하는 주식을 샀더니 사흘 만에 더블 스코어가 났다”는 대목도 현실적인 게 아니다.
하지만 소설 전체에 걸쳐 고르게 공을 들인 내면 묘사와 군데군데 드러나는 상징적인 장면들, 간간이 현실의 이치를 확 꿰뚫는 문장들에는 독자들을 붙잡는 힘이 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