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은 직장여성만의 문제인가.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는 전업주부도 아이를 안 낳는다. 돈 때문이다.
남편 혼자 벌기 때문에 더더욱 낳을 수가 없다.
결혼 2년차 주부 장혜영(張惠英·31) 씨.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남편과 결혼 전 단단히 약속했다. 아이는 집을 장만한 다음에 갖기로. 장 씨는 “남편 혼자 버는 형편에 덜컥 애를 가질 순 없다”며 “아이 앞으로 돈이 쏟아 붓듯 들어가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다음에 아이는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장 씨와 같은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취업주부나 전업주부 모두 자녀 수는 1.78명으로 같다.
보건사회연구원의 ‘2003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 실태조사’ 결과다. 아이를 돌볼 시간이 많은 주부라고 해서 아이를 더 갖진 않는다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육아·교육비 부담’ 때문에 아이 낳기를 포기했다는 응답이 많다.
한국인구학회가 최근 전국 20∼40대 남녀 1008명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출산장려책을 조사한 결과 ‘여성의 일과 가정의 양립’(16%)보다 ‘사교육비 등 교육비 경감’(40%)을 훨씬 많이 꼽았다.》
인천 부평구에 사는 진형(5)이는 아침 먹기가 바쁘게 영어유치원 버스에 올라탄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는 유치원은 점심식사와 간식비를 포함해 한달에 59만 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형이 엄마 박진희(朴眞喜·34) 씨는 지난봄 입학금으로 10만 원을 냈고 6개월마다 한 번씩 교재비 15만 원을 내야 한다.
진형이는 유치원이 끝나면 다시 한 달에 11만 원을 내는 피아노학원에 간다. 이렇게 아이 앞으로 들어가는 돈이 매달 70만 원을 넘는다.
직장여성인 박 씨는 “남들 다 하는데 혼자 안 시킬 수도 없고 맞벌이 부부에게도 교육비와 양육비 부담은 엄청나다”며 “둘째를 가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東京) 도 마치다(町田) 시에 사는 구보 유카리(久保由香里·35) 씨는 아예 출산계획이 없다.
“유치원 때부터 사립에 다니면 고등학교 졸업까지 어림잡아 연간 100만 엔은 아이에게 투자해야 해요. 또 영어 중국어라도 가르치려면 한 달에 3만∼4만 엔은 들겠죠. 그러니 어떻게 아이를 낳겠어요.”
계약직 비서인 구보 씨는 2년 전 결혼에 앞서 장남인 남편에게서 “아이를 갖지 않아도 된다”는 확약까지 받았다.
반면 경제적 부담이 덜한 고소득층은 출산의 선택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사는 이동현(가명·32·사업) 씨는 삼형제를 뒀다.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 가사도우미와 유모가 집에 ‘상주’한다. 개인교사 3명이 번갈아 방문한다. 7세인 큰아이는 매주 두 차례 음악과 미술을 배운다. 4세인 둘째를 위해선 ‘놀이 시터’가 방문한다. 이 씨는 가사도우미와 유모의 월급으로 총 250만 원, 과외비 및 파트타임 시터 비용으로 250만 원을 지불한다.
아기 울음소리가 사라진 농촌과는 대조적 현상이다.
경기 안성시 공도면 공도초교 1학년 1반 37명 중 외동아이는 7명. 반면에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치초교 3학년 3반 37명 중 외동아이는 3명뿐이고 형제가 3, 4명인 경우는 12명이다.
얼마 전 대치동으로 이사 온 주부 최선희(가명·39) 씨는 “자녀가 한 명이면 대전(대치동에 전세 사는 것을 이르는 유행어)에 왔겠느냐. 본전을 뽑으려면 아이 3명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高학력 주부 출산율은 별로 안낮아져▼
사교육비를 비롯한 과도한 양육비 부담 때문에 한국의 저출산은 세계 어느 나라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양상을 띤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 한국에서도 1995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초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인 여성의 출산율이 크게 떨어져 2003년의 경우 0.7명으로 가장 낮다. 반면 초대졸 이상 여성의 출산율은 1.5명으로 가장 높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曺永台) 교수는 “교육수준은 소득수준과 직결되므로 이는 한국에선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출산 기피가 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득에 따른 자녀 출산율 변화는 기대자녀 수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한국결혼문화연구소가 전국의 결혼적령기 남녀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부모의 경제적 여건이 좋은 응답자는 평균 1.78명의 자녀를 희망했으나 ‘경제적 여건이 안 좋다’고 답한 응답자의 기대자녀 수는 1.55명에 불과했다.
▼부담 나눠 지는 스웨덴▼
스웨덴 교포 마무원(57) 씨는 남매를 키우면서 교육비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딸 승희(24·대학생) 씨의 학비는 대학까지 무료다. 아들 시영(20·대입 준비 중) 씨도 골프나 수영, 피아노 등을 지역 문화센터에서 저렴하게 배웠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교포 이희영(32·여) 씨는 아들 승현(2)이를 낳은 직후부터 매달 950크로나(약 12만4800원)의 ‘아동 수당’을 국가에서 받고 있다.
이 씨는 “스웨덴에서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출산을 망설이는 경우는 없다”며 “아이를 키우는 데 부담을 주지 않는 사회”라고 말했다.
스웨덴 보건사회부 안데르스 이크홀름(42) 계획·조정국장은 “스웨덴 가족정책의 핵심은 아이가 있는 가족이 무(無)자녀 가족보다 경제적 부담을 더 많이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회사원 마리아 위스트롬(35) 씨는 “최저 30%에서 최고 55%까지 물리는 세금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국가가 이를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 적절하게 배분하고 있기 때문에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